튀니지 시민들이 쇠톱을 들고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쇠톱은 사우디 암살팀이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시신을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했음을 암시한다. 튀니스=AP 뉴시스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이집트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예멘 등은 줄곧 사우디를 지지하며 이들의 ‘결백’을 믿는다는 태도를 취했다. 사우디 정부가 진실과는 동떨어진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도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줬다”며 칭송했다. 사우디를 향한 이들 국가의 사랑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보여준다.
지난달 27일 북아프리카 국가 튀니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그래서 남달랐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그가 사건의 배후란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자 튀니지를 비롯해 이집트, UAE, 바레인 등 4개국 순방을 시작으로 국제 무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튀니지 시민들은 명확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무함마드 왕세자의 방문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거리 곳곳에는 튀니지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의 피 묻은 손에 그 피를 씻어줄 물을 붓는 그림이 휘날렸다. 그림 속 튀니지 대통령 주머니에는 현금 다발이 가득하고, 무함마드 왕세자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우디의 투자를 바라는 튀니지 정부가 카슈끄지 살인에 대한 혐의, 이에 대한 책임을 씻는 데 동참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튀니지 언론들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이들은 튀니지 기자협회 건물 인근에 전기톱을 든 무함마드 왕세자의 뒷모습을 그린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에는 “튀니지의 민주화 혁명이 오염되고 있다”고 적었다. 시위에 참가한 튀니지의 한 언론인은 “우리에게는 ‘정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왕세자가 앞서 방문한 이집트, UAE, 바레인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였다.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공항으로 직접 나가 무함마드 왕세자를 맞았다. 이날 이집트의 상징 피라미드는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이집트 정부가 그의 방문을 기념해 사우디 국기를 피라미드에 새기는 조명쇼를 벌인 것이다.
튀니지 시민들이 이집트나 UAE 등 다른 국가들보다 살기가 넉넉해 시위에 나온 것이 아니다. 튀니지 경제 사정은 그야말로 절박하다. 극심한 무역적자로 정부 재정은 말라가고, 물가상승률은 매년 7%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튀니지 시민들의 생활비 역시 계속 오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우디는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관대한 기부자였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방문을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튀니지 시민들 역시 사우디의 투자와 지원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우디 현지 언론에서는 무함마드 왕세자 방문 전부터 “사우디가 튀니지 중앙은행에 약 2억 달러(약 2250억 원)의 예금을 할 것이고, 연료 및 군사적 지원도 약속할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중동,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민주화 혁명 ‘아랍의 봄’(2011년) 이전보다 더 심한 군부의 감시와 탄압이 진행 중인 이집트, 내전으로 나라 전체가 붕괴된 시리아와 예멘 등과 달리 튀니지는 아랍의 봄이 남긴 열매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유일한 나라다. 아랍의 봄 진원지였던 튀니지의 시민들은 7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