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국립극장 ‘로얄 내셔널 시어터’. 무채색 콘크리트로 지은 극장 건물 밖에는 거리 음악가의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도히 흐르는 템스강을 따라 늘어선 노점상에는 헌 책이 가득하다. 클래식 공연부터 셰익스피어의 연극, 예술 전시까지 유럽 문화에 흠뻑 젖어들 수 있는 공간이다. 내셔널시어터 내의 300석 규모 소극장 ‘도프만 극장’에 올해 6월 말 ‘어머니’, ‘아버지’, ‘우리’ 같은 한국어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금발의 백인, 곱슬머리를 땋은 흑인 배우들이 진지한 얼굴로 한국인 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연극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문화 교류 프로그램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 런던 북부의 문화 공간인 ‘잭슨스 레인’의 10대 연극 제작 프로덕션에 소속된 이들이 영국의 권위 있는 극장에서 한국 이야기를 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강제 북송 탈북 청소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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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의 작가 인숙 차펠(44)은 영국 신문에 보도된 짤막한 기사를 보고 대본을 써내려갔다. 2013년은 그가 영국의 탈북자 커뮤니티를 처음 접하고, 북한에 관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 조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내셔널 시어터 ‘커넥션즈’의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각본 제작을 제안 받은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결심했다.
‘커넥션즈’는 1995년부터 시작해 매년 열리는 청소년 연극 축제다. 내셔널 시어터가 기성 작가 10명에게 의뢰해 대본을 받으면, 영국 전역의 13~19세로 구성된 유스 프로덕션이 캐스팅부터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한다.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도 어릴 적 ‘커넥션즈’에 참여했다. 올해에는 270개 팀 5200명이 참가했고, 이 가운데 10개 팀이 선발됐다.
“영국 지방 프로덕션의 아이들 대부분은 백인이에요. 극 중 인물을 나와 다른 존재로 보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검은 머리의 가발을 쓰거나 아시안 액센트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요. 등장인물에게 외국 이름을 붙인 것도 같은 이유고요. 상상하기 힘든 삶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글과 연극의 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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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 역할 제한돼 직접 썼다”
“무용수로 무대에 서다 부상으로 일을 쉬었어요. 그 때 내 꿈에 비해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연기 학원에 등록했어요.”
큰 키에 광대뼈가 보기 좋게 나온 개성 있는 마스크의 그는 배우로서의 출발도 나쁘지 않았다. 단역이었지만 첫 무대를 영국 내셔널 시어터에서 시작했고 단편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한계에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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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기회로 바꾼 그는 꿈을 이뤘다. 2007년 집필한 연극 ‘이것은 로맨스가 아니야’로 신인 극작가의 등용문인 ‘베리티 바게이트 어워드’를 수상하고 2년 뒤 런던 소호 극장에 작품을 올렸다. 이 연극은 입양아로서 겪었던 두려움을 섬세하면서도 파격적으로 풀어내 큰 관심을 받았고 티켓도 매진됐다.
“제가 입양됐을 때만 해도 영국은 한국을 가난한 나라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입양되지 않았더라면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을까, 몸을 팔아야 하진 않았을까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 한국에서 자란 남동생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안아주고 화해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고 직접 부딪치며 글을 써온 그이기에, 작품에 대한 평가도 갈렸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에 대해 꾸준히 파고들며 글을 써나갔다. 2016년에는 젊은 북한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평양’으로 영국 최대의 희곡 공모전인 브런트우즈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맨체스터 로얄엑스체인지 극장의 제안으로 헬렌 체의 소설 ‘스위트 만다린’을 극화했다. 소설은 영국의 유명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는 중국 이민자 3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차펠이 꿈꿨던 강한 아시아 여성의 성공 스토리다.
“내가 한국과 아시아에 관심 갖는 건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스웨덴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제 딸도 지난해 한국에 가서는 ‘엄마, 여기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생겼어’라고 했어요. 신기하죠. 그러나 영국인들은 여전히 북한에 대해 핵무기나 포로수용소, 가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만 떠올려요. 잘 알지 못하니 그런 거죠. 저는 이곳에서 나만의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겁니다.”
런던=김민 기자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