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정치부 차장
그러면 한국에서는 왜 스타트업을 벤처라고 부르게 됐을까. 1997년 말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이 제정되고 그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의 활로를 벤처기업에서 모색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당시 대학생이던 기자의 주변에서조차 학교도 채 졸업 안 한 누군가가 벤처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고, 개중에는 실제로 벤처사업에 성공해 큰돈을 번 경우도 있다. “동네 꼬마들조차 벤처 이야기를 하며 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 시절 성공한 벤처사업가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현 정부도 비슷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문재인 경제정책의 3대 축 중 하나인 혁신성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2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는 너무 다르다. 소득주도성장은 컨트롤타워가 김동연 경제부총리냐,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이냐를 두고 시끄럽기라도 하지만 혁신성장은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안 보인다.
문제는 오히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청와대는 혁신성장의 발판인 창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각종 규제를 푸는 일에 공을 들여 왔다. 하지만 번번이 청와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이다. 올 8월 임시국회에서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재벌에 은행을 넘겨주는 일이 될 것이라며 여당 의원들이 법안 통과를 막아선 것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여권 내에서조차 “삼성이 돈 빌려 쓸 곳이 없어서 직접 인터넷은행을 하겠나. 걱정도 심하면 병이다”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차등의결권 도입도 여당 내부 반대를 넘어서는 것이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정부와 여당지도부는 벤처기업법을 고쳐 비상장 벤처기업에서 모든 주주가 동의할 경우, 1주가 2∼10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발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안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여당 일각에서는 “차등의결권이 대기업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거나, “상법에 명시된 ‘1주 1의결권’ 원칙을 깰 정도로 벤처기업 문제가 중요하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외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현장방문을 하며 챙긴 데이터경제 활성화 역시 여당 내부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혁신을 독려하고 기업가를 존중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 수 있도록 도와도 좋은 기업을 키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청이 다른 목소리를 내며 행정부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여당 내부에서 ‘혁신성장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다’라는 합의부터 해야 한다.
전성철 정치부 차장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