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잎들 스틸
경수(정진영 분)는 어릴 적 꿈이 영화감독이었지만 현재는 연극배우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여기고, 알고 지내던 작가 지영(김새벽 분)에게 당분간 함께 지내며 글을 같이 써보자고 제안한다. 지영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경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아름(김민희 분)에게 열흘만 같이 지내며 당신을 관찰하고 싶다고 말한다.
홍상수 감독의 22번째 장편영화 ‘풀잎들’은 카페 구석에서 주인공 아름이 이들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관찰자인 아름은 마치 작가처럼 노트북을 펴놓은 채 글을 쓰고 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 경수에게 재차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름은 잠시 주인공들의 대화와 관계에 개입됐다가도 금세 다시 대화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다. 합석 제안에도 “대화를 엿듣는 게 좋다”고 말하며 거리를 두는 그다. 인물들의 대화로 미뤄보아 사랑과 관련한 사연이 있는 듯하지만 영화는 쉬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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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과정은 카페 밖 슈퍼 아줌마가 심어놓은 야채 새싹들과 교묘하게 중첩되며 삶의 순환이라는 은유도 만들어낸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대화의 주제가 희미해지고 나면, 그 자리엔 남녀간의 관계만이 남는다. 대화의 시간이 지나고 홍수와 미나의 갈등은 사라졌고 경수와 지영의 관계는 시작된다. 아름의 동생 진호(신석호 분)는 누나와 언제 갈등을 겪었느냐는 듯 여자친구 연주(안선영 분)와 연애를 이어간다. 그 모습을 카페 밖 멀리서 지켜보던 아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카페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합석 제안을 해왔던 무리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허무하지만 사랑과 관계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반복되는 게 인생이다.
영화 풀잎들 포스터
아름의 시선이 걷히고 대화에 홀렸다가 빠져나오게 된 순간, 결국 본모습만 남은 인간의 실재와 대면하게 된다. 인간의 미묘한 본성이 솔직하지만 다소 낯뜨겁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 모든 홍상수 월드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는 역시 뮤즈 김민희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는 ‘풀잎들’을 비롯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그 후’(2017) ‘클레어의 카메라’(2018) 그리고 아직 대중에게 공개 전인 ‘강변호텔’(2018)까지 여섯 작품을 함께 했다. 대사와 표정, 제스처, 내레이션 등 좀처럼 규정지을 수 없는 연기로 그가 등장하는 순간마다 몰입하게 만든다. ”비범해 보여요“라는, 경수의 극 중 대사가 온전히 김민희 그 자체를 향한 찬사처럼 들리는 이유다. 오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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