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제도 여론조사에서 실정법 위반,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련 규제 때문 조사 문항까지 규제하는 나라는 없어 참여비 액수도 국가가 정할 사항은 아냐 현 조사 규제는 국가의 과도한 시장개입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그런 김 전 대법관이 대입제도 개편 공론조사 실시 과정에서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대입제도 개편 공론조사에서 ‘지지 정당’을 물은 것이 ‘실정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대입제도 개편은 선거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표본의 대표성을 높이려 가상 휴대번호(일명 ‘안심번호’)를 활용했고 이를 위해 ‘지지 정당’을 물어 ‘선거 여론조사’로 포장했으니 ‘편법’ 내지는 ‘실정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원칙의 아이콘’인 김 전 대법관이 어쩌다 실정법을 위반하게 되었을까? 모호하기 짝이 없는 여론조사 관련 규제에 그 원죄가 있다. 2016년 총선에서 지역구민의 휴대번호를 확보할 수 없어 벌어진 ‘4·13 여론조사 참사’ 이후 ‘안심번호’를 ‘선거 여론조사’에는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바 있다.
‘선거 여론조사’만 ‘안심번호’를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전제도 국가가 판단할 일인지 의심스럽다. 가령 지방정부가 지역 주민의 의견을 묻는 조사를 할 때도 ‘선거 여론조사’로 포장하는 ‘편법’을 써야 대표성 있는 표본 확보가 가능하다. 특정 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벤처기업도 ‘선거 여론조사’로 ‘위장’해야만 지역 주민들의 수요와 선호를 정확히 조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전 대법관이 여론조사 관련 실정법을 위반한 게 김영란 전 대법관이 처음이 아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도 ‘실정법 위반’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당시 공론화위원장도 김지형 전 대법관이었다. 이 조사도 ‘지지 정당’ 설문을 포함하여 ‘선거 여론조사’로 분류되었다. 이때는 응답률을 높여 표본의 ‘자기선택적 편향성’을 최소화하고 대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1차 조사에 참여한 2만여 명 전원에게 5000원의 참여료를 지불한 것이 문제가 됐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선거 여론조사’로 분류되면 1000원 이상의 참여료를 지불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실정법을 위반했던 것이다. 더 정확한 조사를 하는 것을 법이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1000원은 되고 5000원은 안 된다는 기준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법이 이렇게 논리적 근거가 취약하다 보니 사전에 조사기관 관계자조차도 그런 규정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던 듯하다.
그렇다고 이런 규제들이 여론조사의 품질을 향상시켰는지도 의문이다. 10월 첫째 주 대통령 지지율 조사 결과들을 살펴보면 한 조사기관은 75.9%, 또 다른 조사기관은 61.0%로 발표했다. 동일한 시기에 실시한 두 조사가 무려 15%포인트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그 다음 주에도 조사 간 차이가 거의 17%포인트에 달했다.
이들은 작위적인 여론조사 관련 규제 중 일부에 불과하다. 현 여론조사 관련 규제는 국가의 과도한 시장 개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논리적, 과학적 근거도 부족하고 여론조사의 품질을 개선하지도 못했다. 명망 있는 전 대법관들로 하여금 실정법을 위반하게 만들었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문재인 정부가 혁파 대상으로 규정한 수많은 다른 규제들과 다를 바 없다.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