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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60〉달, 포도, 잎사귀

입력 | 2018-09-15 03:00:00


달, 포도, 잎사귀 ― 장만영(1914∼1975)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장만영 시인의 이 시는 ‘시건설’ 2호에 처음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시건설’은 1936년부터 등장했던, 그러니까 퍽 오래전에 발간된 시잡지이다. 특이하게도 평안북도 중강진이라는, 한국에서 가장 춥다는 북쪽 끝에서 꽤 오랫동안 나왔던 잡지이기도 하다. 오래되고 멀어서일까. 옛날 지면을 뒤적거리다가 장만영의 이 시를 만났을 때에는 심지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장만영이라는 시인의 젊었을 적 얼굴과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이 시에 뜨겁게 녹아 있는 듯했다.

맨 처음 잡지에 실린 원문은 오늘날 시선집에 실린 작품과는 몇 군데 다르다. 특히 2행이 다른데, 원문에서는 달빛이 ‘호수처럼’ 밀려왔다고 썼다. 그것을 추후 수정하여 오늘날 널리 알려진 시구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로 바뀌었다. 달빛이 호수가 되고, 그 호수가 다시 밀물이 되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을까. 생전 장만영 시인은 우리 한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특히나 강조하고 소중히 했다. 시인은 역시 모국어 지킴이이며 언어의 장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다.

장만영의 시구에 기대자면, 1937년의 가을밤은 동해 바닷물처럼 푸르고, 호젓하고, 향기로웠다고 한다. 올해의 가을밤이 장만영의 가을밤과 다르지 않기를, 시를 통해 꿈꿔 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