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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인도적 지원의 종언?[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8-08-31 15:55:00


굿네이버스의 평양육아원 지원사업(2006년)

“정권 바뀌고 평양엔 우리가 제일 먼저 갈 줄 알았지.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심지어 기자들까지 줄줄이 방북하는데 우리만 뒤로 밀릴 줄은 몰랐어요. 하하.”

과거 백여 차례 북한에 다녀왔던 베테랑 대북지원 단체 관계자 A는 30일 근황을 묻는 질문에 “손 빨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한 민간 대북지원 단체들의 평양 방문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진벨 재단이 올해 5월 방북했지만 해외단체 자격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 씨가 지난달 방북했지만 남측 민족화해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자격이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교류의 첨병 역할을 했던 우리민족서로돕기, 굿네이버스, 겨레의 숲, 연탄나눔 등 단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중국 등 제3국에서 북측 관계자들을 만나 인도적 지원사업 재개와 방북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기로 하였다”고 한 뒤 문화와 스포츠, 언론교류가 물꼬를 튼 상황에 가장 앞서가리라고 예상됐던 인도적 지원의 분야의 ‘뒤쳐짐’ 현상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원인은 북측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북측이 10년 전과 같은 형식의 인도적 지원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관계자 B는 “전처럼 밀가루나 약품 등을 들고 방북해 사진 찍고 오는 식의 방식은 이제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그 대신 북측은 몇 개의 단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글로벌 공적개발원조(ODA)와 같은 ‘규모가 크고 돈 되는 사업’을 하자고 역제안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측 관계자들은 “공부를 좀 다시 해오라”고 하며 배짱을 부린다고 합니다.

북측의 태도 변화의 핵심 원인은 아버지 김정일과 다른 ‘김정은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자칭 ‘핵 무력 완성’을 했고 올해 4월에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총력 노선으로 전환한 상황에 과거와 같은 식량과 생필품 등의 대한 인도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체면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당국자는 “과거와 같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서 나아가 남북이 윈-윈 할 수 있는 ‘상호이익사업’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해외 단체나 국제기구의 지원사업은 계속하고 있는 점에 비춰 남한에 대한 자존심 세우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미국 대통령과 비핵화 협상을 하고 있고 경제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자칭 ‘핵보유국’이 된 상황에 1990년대 초 ‘고난의 행군’ 경제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우선 먹을 것과 입을 것, 상비약을 받는 것에 고마워했던 ‘흑역사’를 잊어달라는 소리로도 들립니다. 관계자 C는 “앞으로 한국 상표가 붙은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만든 어떤 것도 받지 않겠다”는 말도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북측의 이런 태도에 남측 관계자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입니다. 비교적 규모가 큰 단체들은 북측이 원하는 형태의 사업을 하고 싶어도 한국과 미국, 유엔 등의 제재에 저촉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들은 북측의 요구사항을 만족하면서도 제재에 걸리지 않는 사업 아이템이 무얼까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규모가 작은 단체들은 제재가 풀려도 돈과 노하우가 없어 북측이 원하는 방식의 사업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관계자 A는 “가장 비정치적인 인도적 지원이 정치적인 논리에 묶여 갈 길을 잃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대북 경운기 지원 사업(2001년)

단체들은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를 지속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가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북한 내 영유아·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인도적 위기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정은의 시장 허용 정책과 중국 러시아의 물밑 지원으로 굶어죽는 이들은 없다고 하지만 한국은행이 추산한 북한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3.5%로 국제사회 경제제재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간단체들의 대북지원은 1990년대 중반 긴급 식량 및 의료 지원 등에서 시작돼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대규모 민간 방북과 농업 생산 지원, 제약공장과 병원 건설, 교육시절 지원 등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퍼주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금강산 박왕자 씨 피살 사건(2008년) 천안함 피격 및 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에도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에 대한 북한의 반발과 함께 사실상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