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학폭위 열자” 법정이 된 학교
이달 초 지방의 한 카페에서 만난 10년 차 교사 박모 씨(39)는 인터뷰 내내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자신의 대화를 몰래 녹취하거나 엿듣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2년 전 그가 생활지도부장으로 근무한 학교에서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퇴학 처분이 불가피해지자 가해 학생 학부모는 어떻게든 퇴학을 막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피해 학생을 찾아간 박 씨의 대화를 몰래 녹취했다. 피해 학생 학부모의 식사 권유를 “다음에 하자”며 완곡하게 거절한 걸 마치 접대를 요구한 것처럼 편집해 박 씨를 비리 교사로 몰았다. 가해 학생 학부모는 학교와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고 경찰에도 뇌물 혐의로 박 씨를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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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말다툼에도 “학폭위 열자”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이 학교 현장을 멍들게 하고 있다. 처벌 위주의 현행법에 가해 학생과 학부모들은 “가혹하다”며 소송을 불사하고, 피해 학생과 학부모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고 억울해한다.
교사들은 학교폭력으로 인한 온갖 민원과 소송에 힘겨워하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보다 학교폭력 처리가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현행법상 학교폭력 피해가 신고되면 반드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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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최근 한 초등학교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째려봤다고 학교폭력으로 신고해 학폭위가 열렸다”고 했다. 학폭위 건수는 2013학년도 1만7749건에서 2017학년도 3만993건으로 4년 만에 1.7배로 늘었다.
교사들은 자괴감을 호소한다. 학교폭력 사안 1건을 처리하는 데 교사가 작성해야 하는 공문은 50∼60개나 된다. 절차를 하나라도 허투루 여겼다간 소송의 빌미가 된다. 교사가 학생 진술을 듣고 사안을 조사하는 사실상 ‘경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수사권은 없다 보니 엇갈리는 진술을 확인하려고 따져 묻거나 훈계조로 얘기하는 것도 강압조사나 학생 인권침해로 몰린다.
2년 차 교사 김모 씨(33)는 “학교폭력 업무를 맡으면 수업 준비는 아예 못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소송 당할 위험이 큰 생활지도부장은 교사들 사이에서 기피 1순위다. 최근 학교폭력 관련 소송을 겪은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교장은 심한 스트레스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 전문성 없는 학폭위에 학부모들도 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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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영 청소년폭력예방재단 SOS지원센터장은 “가장 중요한 건 피해 학생 보호”라며 “학교 현장이 학교폭력 사건을 법대로 처리하는 데 매몰되다 보니 정작 피해자 보호, 피해·가해 학생 간 관계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은 가벼운 학교폭력은 학폭위를 열지 않고도 교사와 학교장이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선 방안을 지난해 교육부에 제안했다.
교육부는 이번 주 학교폭력 개선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상돈 교육부 학교생활문화과장은 “다음 달부터 정책숙려제를 통해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김호경 kimhk@donga.com·조유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