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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의 밀리터리 포스]따뜻한 ‘윗물’ 아래 얼음장이 있다

입력 | 2018-08-15 03:00:00


북핵 문제 등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주변 4강의 세력 경쟁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은 섣부른 낙관보다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 안보책략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4·27 남북 정상회담 직후 ‘남북 화해맞이 병무청 주요 민원’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궜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군대를 안 가거나 복무기간이 줄어들 것 같은데 입대를 늦출까요”라는 민원인의 물음에 병무청의 담당 사무관이 “최대한 빨리 가세요. 지금은 기껏해야 강원도로 가지만 앞으론 백두산, 개마고원으로 배치됩니다”라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중국·러시아와의 접경지역이 최전방이 될 것이라는 답변에 ‘우문현답(愚問賢答)’, ‘센스 만점’ 등의 댓글이 달렸다. 일부 누리꾼이 재미 삼아 올린 글로 밝혀졌지만 대한민국의 ‘안보 현주소’를 날카롭게 풍자한 것 같아 마냥 웃고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남북·북-미 간 유화 무드가 이어지면서 한반도 정세가 조만간 화해평화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판문점 선언과 북-미 센토사 합의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 만큼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서둘러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더 나아가 북한의 핵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방식으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역내 평화안정의 첩경이라고 역설하는 정치인과 전문가들도 있다. 북한은 애초부터 핵을 체제 유지와 대미 협상용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김정은의 군사적 우려(주한미군, 미 전략자산 등)만 없애주면 자연스레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주변국들도 ‘핵 없는 한반도’를 적극 지지하고, 어떠한 군사적 위협과 충돌 위험도 사라져 바야흐로 공존공영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지나친 낙관론이라고 필자는 본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와 역내 정세를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구도로 단순화해 어떤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는 논리에 근거한 단견(短見)이라는 얘기다. 겉으론 평화·화해를 내세우면서 속으론 칼을 가는 국제정치의 엄혹한 현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는 경고가 들리지 않는가.

주변을 돌아보면 그 징후는 더 명확해진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국들의 제동장치가 풀린 군비 증강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의 실현을 위한 최우선 순위로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자국산 항모 진수와 스텔스전투기(J-20)·대함탄도미사일의 실전배치에 이어 최근엔 러시아의 최첨단 방공미사일(S-400)까지 배치 가동했다. ‘러시아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불리는 S-400은 최대 탐지거리가 700km로 산둥반도에 배치하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움직임도 탐지할 수 있다. 러시아도 극초음속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추진 순항미사일 등 공격무기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일본도 올해 국방비를 사상 최대로 편성해 해·공군 첨단무기 도입과 군사기지 보강에 여념이 없다. 향후 ‘결정적 시기’에 자국의 실리와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주변 강국들의 ‘완력 경쟁’의 틈바구니에 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 인식은 안이한 것만 같다. 북한과 주변국들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잘 연출된 ‘퍼포먼스’에 도취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지난달 확정된 ‘국방개혁 2.0’도 그 사례다. 복무기간 단축과 병력 감축은 안보상황을 철두철미하게 고려해 신중히 추진해야 하는데도 확실한 보강책 없이 강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적지 않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의 장기화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의 ‘안보 딜레마’가 일거에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부터 접어야 한다. 웃음 뒤에 비수를 감춘 채 ‘한반도 게임’에 달려드는 주변국들의 실체를 간파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할 외교안보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국제 정세에 몽매했던 구한말의 실수가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기우(杞憂)로 넘기기엔 작금의 안보 현실이 너무도 위중하다. 스스로 힘을 길러 외세를 균형 있게 이용하는 ‘자강균세(自强均勢)’ 묘책이 절박한 시점이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는 요원할뿐더러 설령 실현돼도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음을 역사는 숱하게 증명하지 않았는가. 사상 최대의 폭염이 한반도를 덮쳤지만 안보 정세는 곳곳에 금이 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한 발 한 발 신중에 신중을 기해 내디뎌야 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