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장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워싱턴 사람들은 ‘먹고살려면’ 뉴욕타임스(NYT)를 정독해야 했다. 특히 외교안보 뉴스는 NYT 1면에 나면 하루 이틀 후 백악관 대변인이 해당 내용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바마와 이념 궁합이 맞았던 NYT가 백악관 소식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립성 논의와는 별도로 미 언론은 특정 정권과 정부의 거울 노릇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미 언론 중에서도 백악관 주인에 상관없이 워싱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꾸준히 보여주는 매체가 있다. 미국의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이다. 미 행정부가 자기 생각을 외부에 알리려 돈을 대고 관리하는 국영방송이기 때문이다.
외국 매체 보도를 정부 관계자들이 다 수용하거나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VOA의 경우는 좀 다르다. 미 행정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힌트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 간 비핵화 신경전이 하루하루 펼쳐지는 요즘엔 더 그렇다.
사실 800만 달러 남북협력기금은 국내 문제라 미국에 대놓고 물어보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기도 어렵다. VOA는 국무부 관계자가 옆에서 읽어주듯 속내를 전하고 있다. “대북 압박을 성급히 덜어주는 건 (비핵화라는) 그 목표 달성 가능성을 줄어들게 할 수 있다(Any premature relief in economic or diplomatic pressure would diminish the chances that we’ll achieve that goal).” 매일 정부 차원에서 현안별 언론 대응(PG·Press Guidance)을 조율하는 미국 특성상 어디에 물어봐도 이 이상의 공식 답변은 듣기 어렵다. 테드 포 공화당 하원의원이 미 의회의 추가 대북제재 움직임을 가장 먼저 밝힌 것도 VOA 인터뷰에서였다.
일개 외국 매체가 우리 정부에 이래라저래라 하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정부 말대로 워싱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100% 다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나라도 비핵화 논의에 참고할 힌트가 있다면 그게 언론 매체든 사람이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시점이다. 정부에서 김정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매일같이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를 분석하다 대놓고 화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