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동아일보DB신호등이 없는 한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들이 차량 사이로 길을 건너고 있다. 본 기사와는 관련 없음.
제주 밤바다에서 “여기 너무 좋아, 행복하다”던 전화 목소리는 김모 씨(59)가 들은 아내의 마지막 목소리가 됐다. 통화 후 약 3시간 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일 웃으며 떠난 아내는 나흘 뒤 화장(火葬)을 거쳐 김 씨 품 속 유골함에 담겨 서울로 돌아왔다.
김 씨의 아내 엄모 씨(49·여)는 5일 오후 11시 53분 제주 서귀포시의 한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했다. 양모 씨(54·여)가 시속 40~50㎞ 정도로 몰던 아반떼 차량에 받힌 충격으로 함께 길을 건너던 소모 씨(46·여)와 1m 가량 떠올랐다. 소 씨는 엉덩이가 먼저 땅에 부딪히며 목숨을 건졌지만, 엄 씨는 머리가 먼저 땅에 닿았다. 휴가차 서귀포에 사는 친구 소 씨를 만나러 갔다가 당한 사고였다. 8일 서울 강동구 빈소에서 만난 김 씨는 “신호등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휴가를 맞아 자신에게 익숙하지 지역을 찾은 보행자들에게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운전자의 배려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상시 교통량이 적은 지방 관광지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많다.
엄 씨가 사고를 당한 도로는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50㎞인 왕복 2차로다. 중문관광단지와 약 500m 거리로 보행자의 통행이 잦다. 100m 간격으로 횡단보도가 설치됐지만 신호등은 주요 교차로에만 설치됐다. 운전자는 속도를 줄이며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신호등이 없으니 달리던 속도로 통과하는 차량들이 많다. 사고 차량 운전자 양 씨는 경찰 조사에서 “엄 씨 일행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 판독 후 양 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