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한 매력의 ‘여성 팬츠 슈트’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팬츠 슈트가 당당한 현대 여성의 옷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은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2018 프리폴 컬렉션.
프랑스의 ‘여성 바지 금지’ 조례가 사라진 것은 놀랍게도 불과 5년 전인 2013년. 그래서인지 여성에게 있어 바지는 때로 단순한 옷을 넘어 특별한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팬츠 슈트의 등장은 여성 인권 신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32년 디자이너 마르셀 로샤스는 20세기 초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가에서 영감을 받아 최초로 여성용 팬츠 슈트를 선보였다. 이브 생 로랑의 전설적인 ‘르 스모킹(Le Smocking) 룩’ 역시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여성해방운동에 주목해 만들어진 여성용 턱시도 팬츠 슈트다.
도시 여성을 위한 갑옷
선원의 복장을 재해석한 샤넬의 팬츠 슈트.
샤넬은 최근 선보인 2017/18 파리·함부르크 공방 컬렉션에서 뱃사람의 복장을 고급스러운 여성용 슈트로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직업이었던 선원의 의상인 피 코트와 드롭 프런트 트라우저, 줄무늬 톱, 모자 등을 활용해 양성적인 분위기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남성적’이라고 여겨졌던 절제된 직선 라인을 여성 슈트에 적용해 새로운 우아함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연스러운 실루엣의 루이 비통 슈트.
도시의 강렬한 네온사인이 떠오르는 프라다의 컬렉션.
지퍼 장식을 넣은 알렉산더 왕의 팬츠 슈트.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이번 시즌 광택이 있는 새틴 소재의 은색 슈트를 선보였으며,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다채로운 색상의 스트라이프 패턴을 넣은 슈트로 자칫 따분할 수 있는 정장에 화사함을 더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무법 변호사’에서 불의를 참지 않는 변호사를 연기한 배우 서예지의 팬츠 슈트 룩은 연일 화제가 됐다. 냉철하고 강인한 변호사 하재이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데 팬츠 슈트가 큰 몫을 했다는 평가였다.
이렇듯 팬츠 슈트는 성공한 여성의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성 정치인들이 공식 석상에서 팬츠 슈트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대선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상하의가 한 쌍인 팬츠 슈트만 즐겨 입었다. 당시 클린턴의 여성 지지자들은 사회가 규정한 고정적인 성 역할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팬츠슈트 네이션(Pantsuit Nation)’이라는 온라인 페이지까지 만들었다.
대표적인 패셔니스타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도 백악관 선임 고문 역할을 수행할 때에는 단정한 팬츠 슈트 패션을 선보인다. 왕실 결혼식의 전통이었던 ‘남편에 대한 복종 서약’을 하지 않아 화제가 됐던 영국 왕실 첫 흑인 혼혈 왕자비 메건 마클은 여성 권리 신장 운동에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동안 왕자비들이 공식 석상에서 주로 드레스를 입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메건은 팬츠 슈트 등을 입으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온 여성들은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팬츠 슈트 역시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여성들은 더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바지를 입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무의미한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 중이다.
손가인 기자 ga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