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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건혁]채찍과 당근이 함께 필요한 한국 금융

입력 | 2018-07-16 03:00:00


이건혁 경제부 기자

“호랑이는 호랑이네요.”

13일 윤석헌 금융감독원장과의 간담회에 참석한 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는 간담회가 끝난 뒤 기자에게 이 같은 소감을 남겼다. 다른 증권사 CEO는 “딱히 칭찬받을 만한 게 없으니…. 고민이 많다”며 자리를 떴다.

이에 앞서 9일 윤 원장이 취임 두 달 만에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사와의 전쟁”을 언급한 뒤 금융권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윤 원장의 ‘선전포고’는 금융사들이 자초한 면이 적잖다.

채용비리로 홍역을 치른 은행들은 대출금리 조작 의혹 사태까지 이어지며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증권업계에선 삼성증권의 ‘유령주식 배당 사고’로 증권사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서울지점은 공매도 결제도 제대로 못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보험사들도 즉시연금 미지급금 환급 결정을 수개월째 미루다 금감원의 요주의 리스트에 올라갔다.

어찌 보면 금융당국이 이런 금융사들에 회초리를 드는 건 당연한 결과다. 내부 통제를 제대로 해서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기반을 갖추는 건 금융사들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금융사들이 완화된 규제 환경을 마음껏 즐겼다. 풀어진 긴장의 끈을 한 번은 조여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윤 원장의 선전포고가 아쉬운 건 한국 금융사들이 준비해야 할 ‘미래’가 무엇인지, 국내 금융산업을 업그레이드할 청사진이 무엇인지 함께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 금융 전 분야의 혁신과 산업 육성을 주요 정책 기조로 삼았던 금융위원회도 현 정부 들어 통제와 사회적 책임 강조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사이 ‘금융계의 삼성전자’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우겠다는 구호는 사라졌다. ‘메기 효과’를 기대하며 출범한 인터넷전문은행들은 나름의 성과도 올렸지만 여전히 1000억 원 안팎의 적자를 내며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금지한 ‘은산분리’ 규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탓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최근 1년간 추진해온 금융혁신 정책이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방해할 수 있다. 금융사들이 위축돼 자신감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 때문에 금융사들이 자발적인 혁신 대신 현상 유지만 하고 보자는 과거의 행태를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인 2003년 “서울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키우자”는 전략을 발표했다.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이 정책은 금융업 종사자들이 ‘글로벌 금융 강국’의 꿈을 구상하는 토대가 됐다. 현 정부도 금융사들이 금융산업 발전의 꿈을 꿀 수 있도록 당근이 담긴 비전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채찍만으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건혁 경제부 기자 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