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앞에 용서 못받는 ‘남편 죽인 아내’
그래픽 서장원 기자
그가 남편을 죽인 건 2017년 5월이다. 남편은 모임에 다녀온 그의 머리채를 잡고 방바닥에 패대기쳤다. “연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남편은 빨래걸이로 쓰러진 그를 때리고 유리잔과 진열장의 수석을 던졌다. 평소였으면 맞고 끝날 일이다. 술에 취한 그는 남편이 던진 돌을 손에 쥐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편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이혼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 ‘매 맞다 남편 죽인 아내’의 정당방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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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은 대부분 극단적 상황에서 ‘최후의 방어’에 나섰다. 판례 등에 따르면 한 여성은 25년간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큰딸이 자살하는 걸 보고 다투다 남편을 살해했다(2017년). 15년간 폭행당한 한 여성은 자식 앞에서 성폭행당하고 딸이 성추행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2005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대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여성들이 ‘자력구제(自力救濟)’로 남편 살해를 선택한 건 수사기관의 개입이 불충분한 탓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정폭력 사건을 다룰 때 ‘가정 내 보호’를 최우선으로 여겨 수사기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반면 미국에서 가정폭력은 모두 형사사건이다. 그래서 일단 가해자를 체포하고 피해자를 안전하게 격리한다. 아내가 남편 살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상황까지 몰지 않는 것이다.
○ ‘가정폭력 특수성’ 감안해 정당방위 인정 필요
가정폭력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요건도 외국에 비해 까다롭다는 지적이다. 대법원 등에 따르면 국내 정당방위의 기준은 크게 3가지다. 위협이 임박해야 하고, 방어 행위는 최소화돼야 한다. 또 살해까지 이르게 된 경위보다 생명이 침해됐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외국에서는 가정폭력 사건의 경우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미국, 독일 등에서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반복된 폭력으로 ‘공격이 임박했다는 공포’만 느껴도 위협이 크다고 본다. 또 ‘남편 살해’에 이르기까지 경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폭력을 물리친 것이라면 정당방위를 인정한다. 2010년 호주, 2012년 프랑스에선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우리에 갇힌 채 끊임없이 학대받는 동물과 비슷한 트라우마를 갖는다. ‘남편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어로 이어지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지난해 12월 ‘가정폭력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가정폭력을 피하려다 발생한 행위의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넓히는 내용이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