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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20세기 얄타와 포츠담, 21세기 싱가포르 이후

입력 | 2018-07-11 03:00:00

2차대전末 6개월 짚은 책 ‘1945’
여론·선거 의식하는 美英과 달리… 스탈린, 다양한 전술로 목표 쟁취
분단 몰고 온 세기의 담판에서 비핵화협상 교훈과 해법 얻어야




고미석 논설위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마치 삼권분립 하듯 세계를 주도하던 3개국 정상이 나란히 앉은 한 장의 사진.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함축한 세계사의 한 장면이다. 교과서 등지에서 수없이 보아온 이 풍경을 다시 떠올린 것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얄타회담 등에 비견될 역사적 만남’(미국 ABC방송)이란 평가가 나와서다.

얄타회담과 그해 7월 속개된 포츠담회담 등 20세기의 결정적 순간을 조명한 책 ‘1945’를 ‘북캉스’용으로 골랐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은 워싱턴포스트 출신 저널리스트 마이클 돕스의 역작. 당시 협상 주역들의 속내와 뒷얘기를 현장에서 보듯 꼼꼼히 짚어낸다. 가령 스탈린에 따르면 처칠은 ‘지켜보지 않으면 주머니에서 동전까지 탈탈 털 인물’이고, 루스벨트는 ‘더 큰 동전을 털 때만 주머니에 손을 넣는 스타일’이다. 반면 스탈린의 실체를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 본 처칠은 말한다. “공산주의자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악어를 달래는 것과 같다. 그놈이 입을 열면 그게 웃는 것인지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다.”

이 3거두가 회동한 두 회담을 통해 전후(戰後) 처리의 기본방침이 정해졌다. 그 틈에 이 땅의 분단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숱한 이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치명적 사안이 때로 얼마나 허술하게 결정되는지, 소설처럼 생생히 그려진 대목을 보다 보면 머리끝이 쭈뼛 선다. 거창한 회담의 이면에는 역사적 대의나 원칙을 지키기 위한 고뇌보다 협상 파트너 개인의 성격과 그 당시 심신 상태, 자국의 내정 상황 따위가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래서 협상을 위한 협상, 합의를 위한 합의가 상습적으로 이어지곤 하나 보다.

얄타에서 포츠담으로, 그 숨 가쁜 여정을 따라가면서 무릎을 칠 만한 대목이 여럿 있었다. 소련을 공포로 통치한 독재자는 여론과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서방 라이벌보다 유리한 고지에 선다. 협상 단계마다 원하는 것을 기어코 얻기 위해 국내로 눈 돌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상대를 으르고 눙치는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칠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워낙 판돈을 크게 건 만큼 자신들의 도박이 현명하다고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자기의 정치적 직관이 옳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일도 필요했다. 자칫 한발 삐끗하면 국민 기만, 자기 최면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지점에 도달한다.

모든 협상은 디테일 싸움으로 귀결되는데 서방 언론은 얄타에 대해 ‘인류 사회의 이정표’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요즘 상황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있을까. 서글픈 진실은 약소국의 운명이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얄타회담에 폴란드 대표들은 초대받지 못한 채 ‘사형선고’를 받았다. 미사여구와 모호한 표현으로 포장된 포츠담의 공식 발표문은 현실과 얼마든지 엇나갈 수 있다는 강력한 예시로 등장한다.

북-미 협상이 여름날 엿가락 같은 상황에 들어섰다. 위기 모면 후 ‘말의 전쟁’으로 회귀하는 듯한 북을 향해 ‘시간 끌기 협상술로 판돈 올리는 중’ 등 부정적 평가가 다시 이어진다. 그럼에도 한미 정상은 유유자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김정은이) 우리가 서명한 계약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에서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을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배제된 73년 전과 지금의 객관적 상황은 분명 다르다고 해야 할 터다. 하지만 우리의 주체적 참여를 주장한 프로세스에서 들러리로 귀착되면 그 창피를 어디에 견주겠는가. 현실에 눈감고 최악의 상황이 안 오길 바라는 무한 긍정은 어찌 보면 무력감의 다른 얼굴이기에 비관적 태도보다 위험할 수 있다. 국제 협상에서 자화자찬은 의미가 없다. 혹 국내용이라면 모를까.

미 국무장관으로서 2000년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났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여사의 회고담을 참고할 만하다.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를 짚은 책 ‘파시즘: 하나의 경고’를 올해 출간한 그는 “파시즘은 특정 이념을 넘어 어떤 방법이자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파시스트는 지지층에게 복잡한 문제에 간단한 해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현실을 비관 혹은 낙관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많은 것을 걱정하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미래를 긍정하되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는 것, 이게 바로 진짜 리얼리스트의 자세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