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와 선비/백승종 지음/324쪽·1만7000원·사우
기사도가 유럽에 확산된 건 11세기 말부터 2세기 동안 이어진 십자군 전쟁이 계기였다. 십자군 전쟁은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실제론 영토 확대 등 세속적인 목적이 컸다. 사우 제공
저자에 따르면 신사도는 기사도에서 연원을 찾아야 한다. 서양 중세 초기 영주의 아들이지만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이들이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다. 여기서 기사 계급이 생겨났다. 혼란을 보다 못한 교황청은 ‘여성을 못살게 굴지 말라’ ‘상인의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 ‘싸움은 기사들끼리만 하라’ 등의 지침을 내렸다. 기사도의 탄생이다.
기사계층은 16세기 들어 신형 화기가 발달하고 군사적 효용성이 사라지면서 몰락했다. 그러나 기사도는 신사도로 이어졌다. 영국의 향촌 지주층이면서 대부분 작위를 보유하지 못한 젠트리 계층에는 원래 기사들도 일부 포함됐다. 저자는 미국의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가 2007년 펼친 도발적인 가설을 소개한다. 영국에서 젠트리를 비롯한 중산층이 하층보다 자녀를 훨씬 많이 낳았고, 이것이 영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바꿔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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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정홍래(1720∼?)의 그림 ‘소나무와 선비’(의송관단도·倚松觀湍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조선 선비의 이상형은 자아의 인격을 완성해 타인을 평안케 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며 선비들도 새로운 시각을 내놓았다. 실학자인 혜강 최한기(1803∼1877)는 ‘운화(運化)의 기(氣)’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적 용어로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찰과 분석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자각이었다”고 탄식한다. 조선이 망한 뒤 유학자 김택영(1850∼1927)은 서얼 차별 등 성리학적 폐단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저자 역시 ‘성리학 근본주의’가 당쟁과 금서를 통한 사상의 탄압, 쇄국정책 등의 폐단을 낳았다고 본다. 하지만 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청아한 인품을 가졌고, 자연의 고마움을 알았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착취하지도 않았다. 선비들에게 인간의 삶은 천지자연의 일부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통은 거의 단절됐지만 과거 의병운동처럼 지식인과 시민들이 연대해 민주화를 쟁취한 데서 선비정신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선비의 미덕을 계승해 미래로 가는 실마리를 얻어야 한다는 쪽이다. “유교 자본주의는 동아시아의 현주소가 아니라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의 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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