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서방건축가가 본 계획도시 평양의 건축물
북한 평양 지하철 영광역의 내부 모습. 아름답고 화려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세밀하게 조각된 흰색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고풍스럽고 웅장한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 영감을 얻어 1987년 지어졌다. 사진 출처 가디언 홈페이지
북한 평양 문수대 실내외 물놀이장을 찾은 영국 건축가 올리버 웨인라이트 씨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털 천장, 인공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일어나는 물보라들, 형형색색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며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관람객들…. 그가 상상해 온 북한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관광대국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동화 같은 정경에 푹 빠져 있던 그를 확 깨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물놀이장 로비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마치 실물 같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밀랍 동상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부자의 동상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은 건물은 없었다. 설사 건축물의 미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동상과 초상화는 언제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건축물은 경애하는 지도자의 은혜로 지어진 것이니 업적을 기리는 동상을 건물 정면에 두는 것은 북한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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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장인’ 김정은
영국 가디언과 더타임스에 건축담당 기고를 하는 웨인라이트 씨는 2015년 평양을 방문해 문수대 물놀이장을 비롯해 북한이 자랑하는 건축물들을 둘러봤다. 북한 패키지여행에 참가해 열흘 정도밖에는 평양에 머물지 못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그는 건축 전문가적 시각에서 2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북한 여행기와 사진들을 모은 책 ‘Inside North Korea(북한 내부에서)’가 22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출간됐다. 가디언 등에 게재된 저서 요약본에는 건축 전문가의 눈으로 본 북한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2015년 강원도 원산 고아원 완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핑크색으로 칠해진 건물 외벽이 눈에 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북-미 정상회담 이전 외국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미지가 핵 위협을 일삼는 무분별한 지도자였지만 북한 주민들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 김정은은 일종의 ‘건설 장인(master builder)’으로 통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북한 중산층의 욕구가 뭔지 알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현대적 건물과 시설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수호신(champion)’과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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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소련과 파스텔 컬러
웨인라이트 씨가 주목한 북한 건축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북한은 옛 소련 건축의 영향으로 무슨 건물이든 화려하고 장대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다. 상당수 북한 건축가는 과거 소련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소련식 건축에 익숙했다. 1989년 소련의 건축기술을 접목해 세운 능라도 5·1경기장은 수용인원 15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장이라고 북한은 선전한다.
북한은 크게만 짓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적 기교를 통해 건물의 미적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소련의 네오클래식 건축양식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사례가 평양의 지하철역이다. 평양 지하철역 중 가장 큰 영광역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장을 자랑한다. 세밀하게 조각된 석조 기둥이 물결치듯 천장을 받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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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대표하는 유명 건축물들. 크고 높게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마식령 스키장과 함께 대표적인 서구형 레저시설로 꼽히는 문수대 물놀이장, 인공위성 ‘광명성 1호’ 발사를 계기로 3대혁명 전시관에 세워진 인공지구위성관, 여명거리에 버금가는 ‘부촌’으로 통하는 창전거리의 고층 아파트단지, 초대형 매스게임이 펼쳐지는 능라도 5·1경기장 내부(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사진 출처 가디언 홈페이지·조선중앙통신
‘행복감을 유발하는 파스텔색으로 치장한 건축물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웨인라이트 씨는 “김정은 정권의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파스텔의 낙천적이고 모더니즘적인 분위기를 통해 김정은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걱정거리 없는 북한’ ‘번영 일로의 북한’이라는 설명이다. 웨인라이트 씨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북한(김정은)은 국민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으며, 국민을 어린이화(化)시키는 강력한 마취제 도구로 건축이 이용되고 있다.”
○ 화려하지만 텅 빈 건축물들
북-미 정상회담 후 ‘절친’ 사이로 거듭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건축물에서도 유사점이 있다. 유리거울 외관으로 치장한 뉴욕 트럼프타워나 손잡이까지 대리석으로 장식한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 별장은 평양 여명거리 초호화 아파트나 47층짜리 양각도 호텔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웨인라이트 씨는 이를 ‘독재자 패션(dictator chic)’이라고 비꼬았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호사스러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김정은 건축물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북한이 자랑하는 건축물은 화려하게 꾸며 놓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용자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 중산층이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는 있지만 물놀이장, 스키장, 수족관 등을 즐길 만큼 아직 소비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건축물들을 둘러본 웨인라이트 씨는 “(사람이 살지 않는) 연극 세트장 같다”고 비유했다. 그리고 연극의 무대가 바로 평양인 것이다. 북한 가이드조차 “텅 빈 건물에 외국 관광객들이 들어와 볼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웨인라이트 씨는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북한의 현실을 봤다. 평양을 조금만 벗어나자 허물어진 집들과 여기저기 구멍 뚫린 고속도로, 누렇게 녹슨 철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수대 물놀이장이 아니라 이런 곳들이 진짜 북한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건축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미경 전문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