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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비극 부르는 비보호 겸용 좌회전

입력 | 2018-06-13 03:00:00

용산 미군부대앞 사고 2명 사망… 직진신호때 좌회전하다 충돌
교통 빠르게 한다며 서울 203곳 운영… 과속 잦은 도로서 인명사고 빈발




9일 서울 용산구의 비보호 겸용 좌회전(PPLT) 도로에서 BMW 승용차가 좌회전 도중 오토바이와 충돌한 뒤 화재가 났다. 불이 꺼진 뒤 드러난 BMW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부서져 있다. 용산소방서 제공

9일 오전 9시 35분경 서울 용산구 미군기지 근처 왕복 6차로에서 BMW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충돌했다. 충돌 직후 불이 붙어 BMW 동승자인 미국인 A 양(15)과 오토바이 운전자 박모 씨(25)가 숨졌다. 당시 BMW는 미군기기 출입문 쪽으로 좌회전하던 중이었다. 오토바이는 반대쪽에서 직진 중이었다. 사고 현장은 ‘비보호 겸용 좌회전’ 신호체계가 시행 중인 곳이다. 신호등에 좌회전(←) 신호가 따로 있지만 교통 상황에 따라 직진 신호에서도 좌회전이 허용된다. 바로 이 신호체계가 사고를 유발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 사고 유발하는 ‘PPLT’ 논란

서울의 한 교차로 신호등에 부착된 비보호 겸용 좌회전(PPLT) 표지판. 좌회전(←) 신호뿐 아니라 양방향 직진 신호 중일 때도 좌회전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차량 정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사고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비보호 겸용 좌회전(PPLT·Protected Permitted Left Turn)은 이면도로나 폭이 좁은 교차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보호 좌회전과 차이가 있다. 그냥 비보호 좌회전 도로에는 삼색 신호등이 운용된다. 직진 신호 때 반대 차로 상황을 보고 좌회전할 수 있다. PPLT 도로에는 좌회전이 추가된 사색 신호등이 있다. 좌회전 및 직진 신호 때 모두 좌회전이 가능하다. 단, 직진 신호 시 반대 차로에서 차량이 올 때 좌회전하면 신호 위반이다.

9일 사고가 난 BMW는 직진 신호일 때 좌회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오던 오토바이를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오토바이의 과속 여부도 확인 중이다. 10일 오후 10시경 용산 사고 현장을 다시 찾았다. 직진하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좌회전하던 쏘나타 승용차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섰다. 쏘나타 운전자는 “반대쪽에서 오는 차량이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여 방심했다”고 했다. 올 4월 경기 안양시 만안구청 사거리에서도 좌회전하던 택시와 직진하던 오토바이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고 이후 현장에서는 PPLT 시행이 중단됐다.

PPLT만 믿고 직진 신호 때 좌회전하면 이처럼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색 신호등 형태만 봐서는 PPLT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직진 신호 시 좌회전 가능’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지만 운전자가 이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반대쪽 좌회전 차량 진입을 경고하는 별도의 표지판도 없다.

○ “안전 중심 교통 정책에 역행”

PPLT는 2015년 경찰청이 도입했다. 일부 도로에서 좌회전 차량이 몰려 정체가 빚어지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선 한국보다 앞서 PPLT를 시행 중이다. PPLT 기준은 △좌회전 사고가 연간 4건 이하 △왕복 6차로 기준 적정 통행량 15만 대 이하 등이다. 지난달 기준으로 서울에만 203곳에서 운용 중이다. 좌회전을 빠르고 편하게 해달라는 운전자들의 민원도 영향을 미친다. 용산 사고 현장도 2015년 10월 미군 측이 경찰에 요청해 도입됐다.

그러나 운전자의 감각과 판단에 의존하면서 사고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도심 도로의 제한속도를 낮추고 있는 현 교통안전 정책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국가교통안전연구센터장은 “미국과 유럽은 우리와 달리 차로가 좁고 서행 운전이 일반적이다. 규모가 큰 도로에는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규진 newjin@donga.com·김자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