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6·12정상회담 공식화]트럼프 초강수에 당혹… ‘南 중재’ 요청
한달만에 다시 만난 남북정상 포옹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포옹하고 있다. 10대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한 김 위원장은 이날 얼굴 방향을 3번 바꾸면서 포옹하는 스위스식 인사를 했다. 청와대 제공
전날 오후 10시 42분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북-미 정상회담을 일방 취소하면서 김정은의 ‘벼랑 끝 전술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통해 “아무 때나 마주 앉겠다”고 한 데 이어 급기야 오후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만나자”고 SOS를 쳤다. 아무 반응 없던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유화적으로 변하자 23시간 만에 6·12 싱가포르 회담 카드를 다시 살렸다. 벼랑 끝 전술을 펴던 김정은이 ‘트럼프식 충격요법’에 하루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간 셈이다.
○ 시진핑, 다롄서 김정은의 싱가포르행 붙잡은 듯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다롄으로 온 김정은에게 미국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과 무슨 핵 협상을 하려고 하느냐. 지금 미국이 U-2 고고도정찰기를 북한 상공으로 띄워 (김정은 당신이) 뭐 하는지 다 감시하고 있는데 과연 백악관이 북한의 체제 보장을 하겠느냐”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 그러면서 중국 측이 파악한 미군의 최근 대북 정찰일지 중 일부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그래도 당시 ‘강화된 핵사찰’ 등 트럼프의 각종 비핵화 요구에 골치 아파 하던 김정은은 시 주석의 말을 듣고 트럼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토로했다. 김정은이 시 주석 앞에서 했다는 “미국이 (비핵화 논의 국면에서) 승전국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김정은의 싱가포르행 결심은 서서히 흔들린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징후는 다롄 회담 8일 뒤인 16일 김계관 1부상의 담화다.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수 있다”며 북-미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23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이벤트에 한국 기자단을 ‘지각 입장’시키며 한미 양측과 기 싸움을 벌인 김정은은 24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통해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라며 도발의 수위를 끌어올렸다.
○ 김정은, 거부 못 할 ‘비핵화 번개’ 카드로 반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최선희 담화를 보고 24일 오후 10시 42분(한국 시간) 회담 취소라는 초강수를 던지자 평양은 아연실색한 것으로 보인다. 취소 선언 다음 날인 25일 오전 7시 반 김계관을 시켜 “수뇌 상봉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라며 트럼프가 전원 스위치를 꺼버려 박동이 멈춘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 대한 ‘심폐소생술’에 나섰다.
24일 강원 원산의 철도 완공 현장에 이어 25일 원산 갈마관광지구 현장시찰에 나선 김정은은 이날 오후 문 대통령이 회담을 받아들이자 평양으로 돌아와 26일 판문점으로 향했다. 차로 이동했다면 이틀 간 원산∼평양(211km)에 이어 평양∼판문점(175km)의 장거리 주행을 불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을 판문점 통일각에서 만난 김정은은 표정이나 말에서 절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장소도 이렇고 잘 못해 드려서 미안한 마음”이라고 한 건 인사치레라기보다는 갑자기 주말에 불러낼 정도로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무튼 트럼프의 초강수에 대처하기 위해 문 대통령에게 던진 김정은의 SOS는 트럼프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일단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오후 10시경(한국 시간) 기자들과 만나 “(북-미 회담이) 심지어 12일이 될 수도 있다”며 김정은이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 기자가 “김정은이 당신과 게임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묻자 씩 웃으며 “모두가 게임을 한다”며 받아 넘겼다. 25일 전후 벌어진 김정은과의 1차 비핵화 수 싸움에선 이겼다고 스스로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청와대로부터 김정은의 SOS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이런 반응을 내놓았을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