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대화판 흔드는 北]‘비핵화 수위’ 본격 힘겨루기
○ 트럼프식 비핵화 드라이브에 김정은식 ‘옐로카드’
이날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발표한 담화문에는 최근 미국의 비핵화 드라이브에 대한 김정은의 분노가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핵무기 종말처리장’으로 통하는 미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핵무기 반출을 요구하고, ‘리비아식 핵 포기’를 주장하자 강하게 받아쳤다.
미국이 연일 쏟아낸 비핵화에 대한 경제 보상 제안도 일단 거절하는 듯했다. 김정은이 지난달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 총력 노선을 선언한 것을 무색하게 했다. 담화는 “(우리가) 언제 한번 미국에 기대를 걸고 경제건설을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거래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 ‘자존심 레드라인’ 넘지 말라는 북한
북한은 이날 한반도 비핵화 국면 이래 처음으로 북-미 정상회담 ‘재고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북한은 김계관 부상의 담화문에 앞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날 오전 한미 연합 공군훈련인 ‘맥스선더’를 ‘고의적인 군사적 도발’로 규정하고 “조미 수뇌상봉(북-미 정상회담)의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김계관 담화를 오전 11시 18분 추가로 내며 북-미 정상회담에 응할지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강도를 높였다.
북한은 대화에 나선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아량 있는 노력’ ‘대범한 조치’ ‘평화 애호적인 노력과 선의’라고 표현했다. 미국의 대북 압박에 의해 떠밀려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화에 나섰음을 강조한 것. 미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비핵화를 밀어붙였다간 언제든 대화판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 협상력 제고 위한 ‘공개적 신경전’ 가능성 커
하지만 북한은 이렇게 미국과 날을 세우면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갖고 조미 수뇌회담에 나올 경우”라고 밝히며 회담 국면은 깨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결국 북한의 이날 잇따른 엄포는 비핵화 논의가 절정에 치닫기 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공개 경고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양측이 구체적인 합의문 작성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비핵화 수위 및 조건과 관련한 ‘디테일의 악마’를 놓고 수싸움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외교가에선 북한과 미국이 대북제재 완화 시점 등 특히 비핵화에 따른 반대급부와 관련해서 의견 차가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북한이 특히 민감해하는 인권 문제까지 건드린 게 반발을 불렀다는 전언도 있다. 김정은이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다롄에서 만나 “트럼프 행정부가 (비핵화 협의 과정에서) 승전국처럼 군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듯하다.
그렇다고 김정은이 비핵화 협상을 코앞에 두고 ‘싱가포르 회군’을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시그너처 브랜드인 핵-경제개발 병진노선을 없애고 주민들에게 비핵화 원칙을 천명한 마당에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넜다는 얘기다. 한 대북 전문가는 “김정은은 결국 회담장에 나오기 전까지 트럼프 행정부 내 강경파들을 꼭 집어 비난하면서 미국 협상팀의 분열을 노리며 북한의 몸값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