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기만 한 스라밸]<상> ‘셀프 감옥’에 갇힌 아이들
공부 생각만 하면 팔뚝이 간질간질했다. 숙제를 하려고 방에 들어오면 더 그랬다. 샤프펜슬을 팔뚝으로 가져가 조금씩 긁었다. 계속 긁다 보니 팔에서 피가 흘렀다. 책상 위 참고서가 붉게 물들었다. 뒤늦게 상처를 본 엄마가 병원에 데려갔다. 그냥 긁힌 상처로 생각하신 듯했다.
“엄마, 팔이 계속 가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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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아파하는 아이들
14일 오후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학원가를 걷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도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사설 학원으로 향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건우가 2주 만에 속내를 털어놨다. 건우는 매일 4개꼴로 학원을 돈다. 저녁 시간이 넘어 집에 들어가면 개인과외가 기다린다. 과외가 끝나면 숙제와 복습을 한다. 거의 매일 밤 12시가 넘어야 잠이 든다. 어지간한 직장인보다 수면 시간이 적다. 건우가 이따금 “졸리다”고 말해도 아빠 엄마는 “지금 열심히 해야 나중에 편하다”며 달랬다. 하지만 건우는 자신을 달랠 방법을 몰랐다. 심리상담 중에도 “학원에 가야 된다”며 전전긍긍했다. 학원 스케줄 탓에 건우의 상담은 중단됐다.
14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따르면 전국의 초중학생 190명을 조사한 결과 62.6%는 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공부와 삶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피곤해도 아이들은 공부를 놓지 못한다.
열두 살 정현이(가명)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지능지수(IQ)가 130을 넘었다. 그러나 정현이는 늘 자신을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빠 엄마가 성적이 아주 좋을 때만 정현이를 칭찬한 탓이다. 정현이에게 우수한 성적은 ‘존재의 이유’에 가까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10여 개의 학원을 다니게 되자 정현이는 버거워했다. 그러면서도 학원을 그만두지 못했다. 학원을 줄이자고 하면 “그러면 내가 거지가 된다. 집도 못 산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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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스라밸’ 어른까지 간다
학원 교사인 박모 씨(46·여)는 몇 해 전 학원을 다니던 지숙이(가명·15)를 잊지 못한다. 공부를 잘했던 지숙이는 갑작스레 체중이 늘며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사춘기의 체중 문제는 성적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한 발짝 늦어지면 끝장”이라며 지숙이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공부 대신 상담받는 날이 늘어났고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어릴 때 스트레스가 어른이 된 뒤 표출되기도 한다. 홍상명(가명·20)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습관적으로 성적표를 조작했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듣게 될 꾸중이 두려워서다. 조작 사실을 들킨 뒤 부모님은 그를 보듬어주는 대신 심하게 꾸짖었다. 성인이 된 홍 씨는 지금도 종종 심리상담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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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건강도 우려스럽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이모 양(11·여)은 “오후 4~9시 종합학원에 다니는데 저녁을 ‘도시락’으로 20분 만에 때운다”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논의가 한창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의 질을 논하는 ‘스라밸’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김은정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장은 “부모와 자녀 사이 대화 시간이 하루 평균 13분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내용도 ‘학원 잘 다녀왔냐’ 식으로 일방적이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안정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일상의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 스라밸 ::
‘스터디 앤드 라이프 밸런스(Study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 어른에게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필요하듯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공부와 휴식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신규진 newjin@donga.com·권기범·김자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