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LG가 지난달 18일 기아챔피언스필드 1루 쪽 더그아웃 복도 벽에 붙여 놓은 KIA 투수들의 구종별 사인.
게다가 야구 규칙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묘하다. 똑같은 행위가 죄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최근 프로야구 LG의 사인 훔치기 논란이 대표적이다. 상대 팀 배터리(투수와 포수)의 구종(球種) 사인을 훔쳤는데, 타자가 타격에 활용했으면 유죄, 주자가 도루에 이용했으면 무죄다. 훔친 물건은 똑같은데, 그 장물(贓物)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는 셈이다. 들키지만 않으면 유무죄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야구 본고장인 미국 메이저리그에선 사인 훔치기 자체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 상대 팀 사인을 간파하는 것도 선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런 정보를 망원경과 카메라, 전자기기 등 장비를 이용해 수집하고 전달하는 것은 처벌하고 있다. 육안으로 확인하고 교묘하게 수신호 하는 것은 괜찮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하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빈 볼(bean ball·타자의 머리 부근으로 던지는 위협구)로 응징하기도 한다.
국내 프로야구 각 구단 전력분석원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다른 구단 배터리의 투구 패턴 분석 및 사인 캐치다. 어지간한 야구팬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동안 물증이 없었는데 이번에 LG가 상대 팀인 KIA 배터리의 구종별 사인을 A4용지에 인쇄까지 해서 선수들에게 공지해 망신을 당했다.
구단 대표이사가 공식 사과는 했지만 LG 입장에서는 “왜 우리 팀만 갖고 그래? 다른 팀도 사인 훔치기는 마찬가지인데…”라며 억울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논란으로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의 ‘불편한 진실’이 처음 물증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역대 도루왕이나 빠른 ‘발야구’로 돌풍을 일으킨 감독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 팬들이 “혹시 그 선수와 감독의 ‘영업 비밀’은 감쪽같은 사인 훔치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뭔가를 판단할 때 심증과 물증은 천지 차이다.
그렇다면 투수가 던지는 구종을 미리 알고 있으면 도루나 타격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야구 관계자들은 “엄청나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패스트볼의 경우 투구 동작 시작부터 포수 미트에 공이 도달할 때까지 평균 1.3초 걸리는 투수의 변화구는 1.5초 정도로 늘어난다. 그 0.2초 차이는 도루의 성패를 좌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타격도 마찬가지다. 각 구단은 시즌 개막 이전 해외 전지훈련 때 타격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투수가 던질 구종을 타자에게 미리 알려주는 일명 ‘시드 배팅’을 실시한다. 이 경우 3할을 훌쩍 뛰어넘어 5할, 6할 타율도 나온다.
새로운 총재가 취임한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클린 베이스볼’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곰곰이 짚어보자. 클린이라는 단어는 왠지 야구와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같다. 그 대신에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면 어떨까.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스틸도 프로답게 하자.
안영식 스포츠 전문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