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스타크래프트 20년… 1세대 게이머 기욤 패트리
29일 서울 강남구 블리자드 한국사무소에 있는 직원용 PC방에서 ‘1세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기욤 패트리가 프로토스 종족의 핵심 건물인 ‘파일론’ 모형을 손에 들고 웃고 있다. 은퇴 후 방송인으로 전향한 패트리는 “스타크래프트 마니아인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와 한 게임 붙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9일 서울 강남구 블리자드 사무실에서 ‘1세대 스타게이머’ 기욤 패트리(36)를 만났다. 한국에 온 지 19년째인 그는 한국말을 편하게 했다. 2004년 프로게이머를 은퇴한 뒤 현재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스타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였다. 현역 시절 생긴 늦잠 습관으로 인터뷰에 지각했지만 게임 얘기를 시작하자 10대로 돌아간 것처럼 푸른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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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에 왔지만 프로게이머로서의 수명은 길어봤자 1, 2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픽과 사양이 좋은 신작이 계속 쏟아지는데 2년 이상 인기가 지속된 게임이 그때까지는 없었거든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타 성지’ 한국에는 PC방과 게임 중계라는 변수가 있었다.
“고향(캐나다)에서 PC방에 가려면 차를 타고 10분 넘게 걸렸는데 한국은 조금만 걸어도 PC방 천지였어요. 남학생 전유물이던 캐나다 PC방과 달리 여자와 아저씨(회사원) 손님이 많은 것도 신기했죠.”
스타는 한국에 PC방 신드롬을 일으켰다. 게임 아이디만 있으면 세계 누구와도 겨룰 수 있는 ‘배틀넷’(전용 인터넷)과 최대 8명이 삼삼오오 ‘동맹’을 맺고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팀플레이’ 포맷이 인기의 원동력이었다. 함께 놀기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PC방은 방과 후 놀이터이자 2차 회식 장소가 됐다. 1998년 전국 100여 곳에 불과했던 PC방은 2년 뒤인 2000년 1만5000여 개로 폭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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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지 두세 달 만에 대회 우승을 했어요. 패밀리레스토랑에 갔는데 40대 아저씨가 자기 아내, 아이를 데리고 사인을 받아 가는 걸 보고 인기를 실감했죠. 가게에 가면 먼저 알아보고 대신 계산해 주거나 공짜 서비스를 주는 일도 많았어요.”
패트리는 기동성 있는 셔틀(프로토스의 병력 수송선)에 리버(느리지만 대량 살상 능력을 갖춘 지상용 공격 유닛)를 태운 뒤 상대방 진영에 떨어뜨려 기습하거나(일명 ‘슈팅리버’) 자원을 캐는 일꾼을 많이 뽑아 기지 확장(멀티) 전 일일이 컨트롤하는 플레이 등을 처음 선보였다. 한국 선수들보다 손놀림은 느렸지만 멀티 타이밍을 잘 잡고 끊임없이 병력(물량)을 뽑아내 장기전에 유리했다. 스타에 전략과 전술 개념을 확장한 게이머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프로게이머가 뜨자 일각에선 ‘놀고먹는’ 편한 직업이란 부정적인 인식도 나왔다. 정말 그랬을까. 패트리는 지금은 프로게이머들이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지만 초창기 게이머들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타가 1000만 장 넘게 팔렸지만 프로게이머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20명도 안 됐어요. 처음엔 스폰서나 매니저 찾기도 힘들었죠. 상금을 못 받거나 떼인 선수들은 오직 열정으로 견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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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마트폰 게임은 쉬워지고 심지어 자동으로 하던데 그게 게임인지 잘 모르겠어요.”
패트리는 스타의 매력으로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전략’과 노력이 천재를 이기는 ‘열정’을 꼽았다. 그는 “스타에서 제일 마음에 든 건 저와 옆사람에게 똑같이 리버 두 마리씩을 줘도 보여줄 수 있는 게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이라며 “보기는 쉬워도 따라 하기는 어려운 게 스타의 묘미”라고 말했다. 치열한 고민과 연습 없이 영원한 승자도 없다는 얘기였다.
“저도 처음엔 연습 조금만 하고 쉽게 우승하는 ‘천재’를 동경했지만 언제부턴가 지독한 연습벌레인 한국 선수의 기량이 일취월장하는 게 멋져 보였어요. 저도 합숙하면서 관리를 받았으면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했을 텐데….”
기발한 플레이로 승승장구하던 패트리는 자신만큼 창의적인 전략으로 약체 테란을 강자 반열에 올린 신예 임요환 선수(별명 ‘테란의 황제’)에게 패하며 데뷔 4년 만에 은퇴를 결심한다.
15년 전 동료들과 누볐던 스타 전장에선 이제 인공지능(AI)과의 대결이 시작됐다. 지난해 세종대에서 인간과 AI의 첫 번째 대회가 열렸고,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도 게임시스템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패트리는 인간의 승리를 쉽게 장담하지 못했다. 그는 “스타는 생각하고 컨트롤할 게 너무 많은 게임이라 지금 당장은 이영호 선수(현재 1위)를 이길 AI가 없을 것”이라면서도 “컴퓨팅 능력이 배가되면 키보드나 마우스를 안 쓰는 AI가 더 유리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식상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바꾸지 않았다. ‘패트리에게 스타란?’
“20년이 지났지만 스타를 했던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해요. 스타에 대한 추억과 함께 자란 거죠. 저에게는 삶과 길을 이끌어준 ‘등불’이었는데 여러분에게는 어떠신가요?”
신동진 shine@donga.com·임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