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1/2년을 살았다/조지프 마코비치 글/마크 어스본 사진/96쪽·1만3000원·클
조지프 마코비치 씨는 비닐봉지를 들고 다닌다. 그 안에는 오렌지주스 팩이 들어있다. 클 제공
사진작가인 어스본은 2007년 우연히 마코비치를 만난 후 독특한 분위기에 끌려 사진을 찍다 친구가 됐다. 책은 1927년 이스트런던에서 태어난 마코비치의 생을 주제별 짧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냈다. 솔직하고 천진하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와 꾸밈없는 표정들을 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가방에 리벳(큰 못)을 박는 일을 20년 동안 한 마코비치는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 그래도 괜찮단다. 마차도 봤고, 카메라가 발명된 것도, 프로젝터도 봤기에. 무엇보다 배를 곯은 적이 없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끔 빠른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가구점 양장점 뮤직홀이 있던 곳에 들어선 거대한 경기장을 보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슬플 때는 계속 걷는다. 울어봤자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으므로.
그에게 중요한 물건은 세 가지다. 열쇠, 버스카드, 벨트. 열쇠가 없으면 집 밖에 있어야 하고 버스카드가 없으면 집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지가 흘러내리면 버스에 태워주지 않을 테니 벨트도 소중하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과 우주를 탐험했던 그는 2013년 눈을 감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특별할 것 없지만 비우고, 성찰하고, 맑게 사는 법을 조용히 알려줬다. 그가 이 말을 들었다면 선한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겠지만.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