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리옹에서 15년째 살고 있는 한 한국인 지인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나이를 전해 듣고는 가소롭다는 듯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782년에 지어졌다고 말했다. 자기 주위에는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에 사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했다.
어떻게 지은 지 200∼300년 된 집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집주인 크리스티앙이 직접 답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방의 벽에는 구멍을 때우고 페인트칠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고리를 고치고 계단을 손본 흔적도 뚜렷하다. 그는 거의 매일 연장을 들고 나타나 혼자서 뚝딱거리다가 돌아간다.
재건축을 위한 이주 공고가 났기 때문에 10년 넘게 살아온 집을 떠나야 했던 몇 달 전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집은 지은 지 40년쯤 된 아파트였다. 40년 나이의 서울 아파트는 곳곳에 녹이 슬고 금이 가고 낙서투성이고 칠이 벗겨져 더럽고 난방기를 계속 돌려도 추웠다. 그 집이 그 모양인 것은 지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작 40년이다) 고치며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치지 않은 것은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부수고 새로 지을 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건축추진위원회인지 하는 것이 결성되고 나면 재건축 인가를 받기 위해 일부러 건물을 더 낡아 보이도록 방치한다고 한다. 수리를 하거나 페인트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에서 집은 주거의 공간이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사는’ 곳이 아니라 ‘사고파는’, 사고팔기를 잘해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투기 상품이 되어 버렸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아파트단지나 지은 지 30년만 되면 재건축을 하겠다고 나선다. 고치지 않은 낡은 집이, 곧 부서질 집이 더 이익을 볼 거라는 기대로 비싸게 거래되는 현상은 이상하다. 이 이상한 현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집을 소유와 축재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관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집이 투기와 치부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집은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안전하다. 자궁이 없다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집인 자궁은 아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일부이지 아이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아이의 신체 기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자궁을 아이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자궁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집은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근거가 된다. 자연, 즉 외부 세계의 완전함에 맞설 수 있도록 불완전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관과도 같은 것, 그러니까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것이 집이다.
집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투기의 수단으로 여겨 사고팔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부수고 새로 짓고 할 수가 없다. 토지와 집에 대한 관념의 혁신이 없이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주입되고 부풀려진, 소유물과 축재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집’의 명예를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토지공개념 같은 것으로 대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집을 빌려준 프로방스의 한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네 집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