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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타는 할배들 “인생 정상에서 멋지게 활강해야죠”

입력 | 2018-01-06 03:00:00

[토요기획]6070 스키 마니아들 모임 ‘오파스’




지난해 1월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스키)대회’ 입상자들의 시상식. 입상자들은 적게는 5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만 원을 기부했고, 이 기부금은 대한장애인스키협회에 전달됐다. 올해 1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회 대회 기부금은 스키 안전 캠페인에 활용할 예정이다. OPAS 제공

‘▽만 60세 이상만 가입 가능 ▽회비 10만 원에 무료 리프트, 경품, 식사 제공 ▽입상자는 반드시 5만 원 이상 기부할 기회 제공.’

지난해 시작된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대회’(skiclubopas.org)가 내건 행사 내용 일부다. 여기서 할배는 할아버지, 썰매는 스키를 뜻한다. 참가 자격도 특이하다. ‘1958년 입춘 이전 출생자’에 ‘스키에 대한 정열, 나눔에 대한 열의가 남다른 분’만 가능하다.

이처럼 튀는 ‘할배 썰매’ 이벤트를 기획한 주인공은 ‘오파스(OPAS)’다. 역동적으로 스키를 즐기는 노인들(Old People with Active Skiing)의 약자. 현재 회원은 17명에 불과하지만 면면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이한준 한양대 석좌교수, 김영택 건축가, 김준규 전 검찰총장(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민복기 카파코리아 사장, 남승우 풀무원 총괄사장, 서정우 과학기술대 교수, 엄익태 성형외과 전문의, 조성헌 동국대 교수 등이 소속돼 있다. 오파스의 수장은 간삼건축 김자호 회장(73)이 맡고 있다. 알펜시아리조트, 아쿠아플라젯 여수, 푸르메재단 넥슨 어린이재활병원 등을 설계한 한국의 대표 건축가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모두 다른 영역에서 일가를 이뤘지만 ‘스키 마니아’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모였다.

지난해 1월 경기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스키) 대회’의 다양한 풍경들. 설원을 가르는 실버들의 질주가 가슴 시원하다. 이날 총 60여명이 참가해 60,70대 연령대별 경기와 단체전, 단체 활강 등이 진행됐다. 입상자들은 적게는 5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 만 원을 기부했다. 이렇게 모아진 기부금은 대한장애인스키협회에 전달됐다. 올해 1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회 대회 기부금은 스키 안전 캠페인에 활용할 예정이다. OPAS제공




스키에서 위로를 찾다

‘즐거운 노년을 위하여!’ 지난해 1월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행복나눔 썰매(스키)대회’ 직후 참가자들이 단체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60대 이상 60여 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OPAS 제공

할배 썰매 행사가 기획된 건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무 격인 신병준 순천향대 의대 교수(64)가 국내의 한 아마추어 시니어 스키대회에 출전한 게 계기가 됐다. 40대가 대거 참석한 대회에서 60을 앞둔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이 든 사람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만을 위한 행사가 필요했어요.”

신 교수는 이한준 교수(68)와 의기투합해 2016년 준비모임을 가진 뒤 스키 애호가이면서 기부에 관심 있는 지인들을 모았다. 우의를 다지고 나눔을 실천하자는 취지였다. “나이는 들었지만 활기차고 젊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고요.”

그해 12월 ‘오파스’라는 이름이 정해지고, 본격적인 대회 준비 작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해 1월 첫 대회가 열렸다. ‘서설화’(서울고) ‘설화모’(경기고) ‘팔백회’(중동고) 등 스키 좀 탄다고 자부하는 고교동창 단체 팀들이 앞다퉈 신청서를 냈다.

60여 명이 참석한 이 대회는 여성부, 60대, 70대 이상 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스키경력 4년 차 초보부터 45년 차 프로급까지 다양했다. 행사 직후 입상자들은 메달을 목에 건 뒤 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을 기부했고, 이 성금은 대한장애인스키협회에 전달됐다. 실버세대를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대회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도네이션(기부)으로 이어진 것이다. 2회째인 올해 대회는 이달 26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다. 참석자는 지난해보다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신청자가 크게 늘고 있어서다.


지난해 1월 경기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스키) 대회’의 다양한 풍경들. 설원을 가르는 실버들의 질주가 가슴 시원하다. 이날 총 60여명이 참가해 60,70대 연령대별 경기와 단체전, 단체 활강 등이 진행됐다. 입상자들은 적게는 5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 만 원을 기부했다. 이렇게 모아진 기부금은 대한장애인스키협회에 전달됐다. 올해 1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회 대회 기부금은 스키 안전 캠페인에 활용할 예정이다. OPAS제공


스키에서 물아일체를 체험하다

‘오파스’ 멤버들이 스키에 매료된 이유는 각기 달랐다. 경기고 재학 시절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었고 요즘도 등산 골프 등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인 김 회장은 해마다 40여 일을 국내외 스키장에서 산다. 그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게 스키”라고 했다. 산천을 바라보며 하얀 눈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자연이 돼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또 “스키는 혼자 타도 좋지만 여럿이 하면 더 즐거운 운동”이라고 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동료와 대화하고 스키를 타고 내려와 함께 식사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인생의 즐거움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스키를 평등한 스포츠”라고 정의했다. 연세대 1학년 때인 1969년 스키에 입문해 대관령 스키장에 갔을 때다. 당시 스키장엔 리프트가 없었다. 누구나 옆걸음으로 정상까지 걸어 올라야 했다. 지역주민부터 산악인, 학생 등 다양한 이들이 스키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단어가 ‘평등’이었다. “스키는 가장 스케일(규모)이 큰 스포츠입니다. 자연과 스피드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요. 특히 때 묻지 않은 하얀색(설원)에 머문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지난해 1월 경기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스키) 대회’의 다양한 풍경들. 설원을 가르는 실버들의 질주가 가슴 시원하다. 이날 총 60여명이 참가해 60,70대 연령대별 경기와 단체전, 단체 활강 등이 진행됐다. 입상자들은 적게는 5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 만 원을 기부했다. 이렇게 모아진 기부금은 대한장애인스키협회에 전달됐다. 올해 1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회 대회 기부금은 스키 안전 캠페인에 활용할 예정이다. OPAS제공


신 교수는 30여 년 전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았던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당시 스키 초보자였던 그는 그림 같은 인스부르크의 스키장에서 멋지게 S자를 그리며 눈길을 내려오는 선수들이 부러웠다. 자연을 제대로 즐기려면 스키를 잘 타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강습 비디오에 나온 문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설경. 은백색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 그게 바로 스키다.’



스키에서 인생을 배우다

‘할배들의 행복나눔 썰매(스키)대회’를 기획한 ‘오파스(OPAS)’ 김자호 회장(간삼건축 회장·왼쪽)과 신병준 순천향대 의대 교수. 둘은 60대 이상 노년층만을 위한 스키대회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부문화를 접목한 새로운 스키문화 조성을 시도하고 있다. 김 회장과 신 교수가 4일 서울 중구 동호로 간삼건축빌딩 옥상 ‘학소정’에서 스키를 타는 포즈를 취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들에게 스키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인생의 교훈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 교수는 스키를 ‘내려서기(going down)를 가르치는 스포츠’라고 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만 실제로는 내려오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또 오르는 도중엔 포기할 수도 있지만 내려오는 건 그럴 수 없어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오를 때까지 올랐으면 스키처럼 멋지게 내려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스키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스키를 안전하게 타는 법을 가르치는 게 스키 지도자”라고 했다. 스키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스키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철칙이 있다. 스키는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앞사람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에선 사고를 낸 사람을 형사처벌한다. 우리도 스키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키는 자칫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어 노인에게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신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나이가 들면 하체가 약해지고 균형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스키는 하체 단련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도 “안전수칙만 잘 지키면 노인에게 스키는 행복한 운동법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4일 서울 중구 동호로 간삼건축빌딩에서 김 회장과 신 교수를 다시 만났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두 사람의 대화는 스키 얘기뿐이었다. 김 회장이 “이번 주말엔 강원도에서 스키를 타며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하자 신 교수는 “겨울이 너무 짧아 아쉽다”고 했다. 할배들의 유별난 스키 사랑이 느껴졌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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