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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한반도 ‘빅 픽처’

입력 | 2018-01-03 03:00:00

개성공단 폐쇄 트집 잡기는 대북제재에 열의 없다는 뜻
정부 수립 70년 건너뛰고 임시정부 100년 외치는
속셈 읽으려면 조각 맞춰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더글러스 케네디의 베스트셀러 소설 중에 ‘빅 픽처’가 있다. 훌륭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책이다. 다 읽고 나도 제목이 왜 ‘빅 픽처’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긴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말과 행동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말은 종종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논쟁을 회피하지 않고 뚫고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 정부는 솔직했다. 그런 점에서 ‘반미면 어떠냐’고 말한 노무현은 최소한 음모가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이 정부의 말은 관리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야만 그들이 추구하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청와대는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의 말이 나올 때마다 개인적 의견일 뿐이라고 거리를 뒀지만 결국 문 특보의 말대로 되고 있다. 문 특보는 한미 군사훈련과 북한 핵실험을 동시에 중단하는 중국의 쌍중단(雙中斷)과 유사한 북핵 해법을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에 한미 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함으로써 쌍중단을 향한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


쌍중단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혔음에도 그렇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 완성을 위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미국도 군사훈련을 연기할 수는 있을지언정 중지하기 어렵다. 쌍중단은 쌍궤병행(雙軌竝行)으로 가겠다는 신호로서만 의미가 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어렵고 대북 제재에 구멍이 뚫려 있는 한 북한은 조만간 핵무기를 완성할 것이고 그때야 비로소 핵과 주한미군 철수의 맞교환이라는 쌍궤병행에 응할 것이다.

정부의 대북 제재 강화가 말뿐임은 절차를 다 따랐다 하더라도 바뀌었으리라고 보기 어려운 개성공단 폐쇄를 그 일부 절차를 트집 잡아 불법으로 몰아간 데서도 확인됐다. 문 대통령은 중국 방문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대북 원유공급 중단에 대해 당부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부의 ‘평화를 위한 복안’이란 대북 제재는 건성으로 하면서 북한이 협상에 응하는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 신년사에는 올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총리의 신년사는 뜬금없이 올해를 건너뛰어 내년 상하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언급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어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다’고 썼다.

대한민국에는 정통성이 없고 북조선인민공화국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 학자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장에 앉혀 국정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에 앉힌 정부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코드다. 정부가 추구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 태어난 해방정국의 혼돈으로 되돌려 그 속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외교적 귀결이 한미 동맹으로부터의 거리 두기와 친중(親中) 노선의 강화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만든 신조어 ‘투키디데스 함정’이 기존 강국인 미국과 신흥 강국인 중국의 충돌을 설명하는 데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미중 충돌에만 주목하는 건 강대국주의자의 시선이다. 우리로서는 그 충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봐야 한다.

투키디데스 전문가인 예일대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존 강국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메가라가 신흥 강국 아테네의 경제 압력에 굴복해 동맹을 갈아타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섣부른 동맹의 교체 시도는 큰 위험이 따른다. 미국 잡지 ‘디플로맷’이 언급했다는 이 상황에서의 ‘저울질(balancing act)’은 조롱의 말이지 칭찬이 아니다. 한미 동맹의 균열은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새해에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목적지를 솔직히 밝히지 않는 운전자다. 상상력을 발휘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지 않은 승객은 ‘어, 어’ 하다 낯선 곳에 내리고 나서 후회할 수 있다. 차창으로 낯선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이 차를 세울 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