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좀 엉뚱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산업기술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 위탁생산하는 방식으로 규모를 키워 오다가 희한하게 1980년대 초반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산업기술 분야에서 독자 설계에 도전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가히 폭발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이때부터 수출 상품들이 본격적으로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졌다. 현재 우리 산업을 대표하는 주력 제품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독자 설계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80년대 초의 한국 산업기술 발전 과정에서의 캄브리아기 폭발, 즉 갑작스러운 질적 전환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많은 외국 전문가도 궁금해한다. 그 해답의 단초는 ‘역(逆)설계’라는 개념에 있다.
때마침 대학원 수준의 공학적 소양을 익힌 ‘가방 끈 긴’ 신입사원에게 맡겨 보았더니 여차저차 공학적 지식을 활용해서 핵심 원리를 해석해 냈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알아낸 원리들로 마침내 소형 압축기를 성공적으로 자체 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압축기 업계의 선진 회사들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역설계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회사, 특히 현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과학기술적 원리보다 본인의 경험을 우선하고 석·박사들은 현장도 모르는 철부지로 홀대하기 일쑤였다. 연구개발이란 것도 당연히 돈 낭비로 여겼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역설계의 사례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과학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설계 원리를 재해석해 낼 수 있다면 그 원리를 응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역설계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을 번역한 말이다. 흔히 완제품을 뜯어보고 똑같이 만드는 모방 과정의 한 종류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게 아니다. 분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적 지식을 바탕으로’ 원래의 설계 원리를 거꾸로 파악해 내는 것이 핵심이다.
제대로 된 역설계로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대형 압축기를 소형화하듯 제품 자체를 독창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똑같이 만든다 하더라도 더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역설계는 알고 보면 그 자체가 독창적인 과정이고 오리지널로 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산업계에는 새로운 제품과 기업은 등장하지 않은 채, 그 당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주력 제품들이 공룡처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이후 오랫동안 정체기를 헤매고 있는 양상이다.
창의적인 퍼스트 무버가 되자는 구호에 휘둘려 근본 없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만 찾아다닐 때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의미의 역설계부터 하면서 혁신의 아이디어를 벼려 가는 초심의 자세가 필요하다. 첨단 기업이라는 테슬라도 새로운 전기차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수십 대의 완성차를 사서 분해하며 끊임없이 역설계하고 있다. 우리 산업도 기본으로 돌아가 역설계부터 탄탄하게 다시 시작할 때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