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체육회 제정 ‘2017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차 범 근 前축구 감독
차범근 감독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독일 도베르만 3년생 수컷 주니어와 6개월 암컷 줄리를 끌어안으며 활짝 웃고 있다. “그동안 난 주인공으로만 살아왔다”는 차 감독은 “이젠 내가 조연으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요즘 가족 얘기를 많이 한다.
“내 축구인생을 돌아보면 가족의 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공할 때 가족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생을 감수했다. 아내는 내가 넘어져 못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늘 나를 잘 지켜줬다. 내게 오는 비난을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한국 선수론 최초로 유럽 최고의 무대인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황색 돌풍’을 일으킨 차 감독이지만 그의 축구 인생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을 때 본선에서 2경기(멕시코 1-3패, 네덜란드 0-5패)를 하고 현장에서 경질되는 아픔을 겼었다. 그해 한 월간지에 ‘프로축구 승부조작’(나중에 사실로 밝혀짐) 행태를 폭로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10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당시 도를 넘는 비난의 화살이 차 감독을 넘어 아내 오은미 씨 등 가족을 향하기도 했다. 둘째 차두리 한국축구대표팀 코치(37)는 선수시절 한동안 언론 인터뷰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독일에서 활약할 때도 오해가 있었다고 하던데….
“처음 독일 가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프로라는 게 뭔지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갔다. 첫 시즌이 끝나고 휴가를 주기에 한국에서 하던 대로 4주 푹 쉬었다. 다시 소집하고 훈련 시작했는데 시즌 때와 똑같이 시켜 당황했다. 엄청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은 거뜬하게 소화했다. 휴가 때도 몸 관리를 했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프로는 늘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부터 철저하게 관리했다. 아내는 덩치 좋은 유럽 선수들을 잘 상대할 수 있도록 먹는 것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다. 특히 경기를 앞두고는 컨디션 관리에 집중해야 했다. 독일 현지 한국교포들이나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다 신경 쓸 순 없었다. 그래서 다소 오해가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위해서 축구에만 집중해야 했다. 성공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성공했으니 이제 그때 오해했던 사람들도 이해할 것이다.”
차 감독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서 활약하며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터뜨렸다. 당시 외국인 최다골이다. 유럽 최고의 무대인 유럽축구연맹(UEFA) 컵 우승도 2차례(1980, 1988년) 경험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일에서 몸으로 익힌 ‘프로정신’은 한국에 돌아와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도 오해를 낳기도 했다. 오 씨는 “일처리에 너무 철저해 아랫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수원 감독 시절 숙소에서 집으로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보 제발 집에 좀 오세요. 코치와 선수들도 숨을 쉬어야 할 것 아니에요’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회상했다.
―축구로 성공했다. 인생에서 축구가 뭔가.
경기 화성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차 감독은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남달랐다. 서울 경신중고교 시절 밤낮없이 축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로 1971년 청소년대표, 고려대 1학년 때인 1972년 역대 최연소로 성인대표팀에 발탁됐다. 그의 눈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향했다.
―독일 진출은 어떻게 생각했나.
“당시 국내는 실업팀밖에 없었다. 희망이 없었다. TV로 유럽 프로팀들을 볼 때 잘 갖춰진 잔디 경기장에서 꽉 찬 관중 앞에서 경기를 했다.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독일 진출을 마음먹었다.”
영웅이란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차 감독은 우리 국민들이 힘들고 배고프던 시절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숱한 골을 터뜨려 희망을 전해줬다. 태극마크를 달고도 A매치(국가대표 간 경기)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터뜨렸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역만리 독일 분데스리가와 각종 국가대표 경기에서 전해지는 그의 골 소식에 환호했다. 그는 한국축구의 선구자이자 영웅이었다.
―요즘 손흥민(토트넘) 등 해외에 진출한 선수가 많다. 당시 분데스리가가 더 수준이 높다는 평가가 있는데….
“허허.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만 요즘 선수가 더 잘한다. 정보기술(IT)로 따지면 새로운 기술이 좋은 것 아닌가. 난 구시대에서 축구를 했다.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 두리와 얘기하다 보면 옛날 사람인 것을 절감한다. 난 30년 전에 축구를 배웠다. 지금은 분석도 훨씬 정교하다. 아주 완벽하다. 축구도 변했다. 전술도 다양하고 선수들이 대처하는 기술도 다양하다. 옛날과 비교하면 안 된다.”
―그래도 정신력에선 그때와 다른 것 아닌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젠 옛날처럼 배고픈 시절이 아니다. 내가 과거엔 이랬다고 하면 우리 두리도 뭐라고 한다. 우리 시대에는 사명감에 불탔지만 요즘은 즐기면서도 다 잘한다.”
차두리 코치 얘기를 할 때 오 씨가 “참 어제 두리에게 문자 왔어요.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이 안부 전해달라고 했대요”라고 했다. 차 감독은 “아 그래요. 아네르센, 낯도 익고 이름도 들어본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출신 예른 아네르센 북한 감독(54)은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 FC 뉘른베르크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2003년부터 주로 독일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차 감독은 “당시 다른 팀에 노르웨이 선수가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인 것 같다”고 기억했다. 한국은 11일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컵에서 북한을 만나 1-0으로 이겼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지난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독일을 만나게 됐다.
“독일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FIFA 초청으로 조 추첨 장소에 갔는데 입구에서 알고 지내던 독일 TV의 국장을 만났다. 혹 독일과 한 조가 되면 인터뷰를 해달라고 하더라. 그 때 속으로 ‘독일?’ 했는데 참 나, 우리가 독일하고 한 조가 됐다. 나올 때 그 친구를 보니 요아힘 뢰브 독일 감독하고 인터뷰하고 있더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함께 뛴 뢰브에게 인사는 해야 했는데 괜히 인터뷰해 달라면 곤란해 박지성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독일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어설픈 팀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 최선을 다해서 잘하면 기쁨이 배가 되는 것 아니냐. 어줍지 않은 팀에 깨지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독일이 우리와 마지막 경기를 한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2경기를 이기면 주전들을 빼고 젊은 선수들을 투입할 수 있다. 그런데 젊은 선수가 더 무섭다. 그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더 열심히 뛸 것이다. 절대 방심은 금물이다. 어떤 경기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열세라고 대충하면 팬들도 안다. 하지만 한 수 아래라도 열심히 했을 땐 팬들도 박수를 보낸다.”
―최근 축구협회 집행부가 바뀌었다. 홍명보 전무이사(48) 등 집행부의 연령대가 대폭 낮아졌다.
“그 정도 나이면 큰일을 할 시기다. 다른 회사나 조직을 봐라. 홍 전무가 감독했던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줘야 할 시점에 제대로 결정했다. 변화를 시도하면 불이익을 받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행정엔 양면성이 있다. 진통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새 시대에 맞게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젠 유소년을 잘 키우는 시스템 확보 등 해야 될 일을 피하면 안 된다. 과감하게 변화를 줘야 한다.”
―너무 일찍 지도자를 그만둔 것 아닌가.
“우리나라에 감독 자리가 몇 개나 되나. 유럽처럼 축구 일자리가 많지 않아 안타깝다.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 할 만큼 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유럽에서 보고 배운 것을 전수했다. 내 역할은 다했다. 이제 어린이 축구교실 등 저변을 늘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그게 조연의 역할 아닌가.”
인터뷰 말미에 하나(39) 두리 세찌(31) 등 자녀들 이름을 한글로 지은 배경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오 씨가 답했다. “첫째 이름을 동아일보 출신 국흥주 기자님이 ‘하나’라고 지어줬다. ‘그럼 둘째는요?’ 했더니 ‘두리 세찌라고 하든지’라고 했다. 첫째 딸을 하나로 지었으니 자연스럽게 두리 세찌가 됐다.” 오 씨는 “국 기자님 근황이 어떤가요. 바쁘게 사느라 인사도 못했네요. 지금이라도 이름 지어준 보답을 하고 싶은데…”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극구 사양했지만 “어차피 시장에 가야 해요”라며 차 감독 부부는 기자를 청계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 내려준 뒤 성북 시장으로 향했다. 차 감독은 가족이 원하면 언제든 운전대를 잡는다. 수십 년 그라운드를 지배한 카리스마 넘친 남자는 아내가 “이것 좀”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가슴 따뜻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차범근 감독은
△1953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 경신중, 경신고,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1972년 최연소로 국가대표 발탁,
1986년까지 A매치 136경기 출전 58골 기록
△1979년 프랑크푸르트 입단, 1983년 레버쿠젠 이적
△1980, 1988년 유럽축구연맹컵 우승
△1989년 은퇴. 유럽무대 308경기 출전 98골 기록
△1991∼1994년 울산 현대 감독
△1997∼1998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1997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감독
△2004∼2010년 수원 삼성 감독
2004, 2008년 K리그 정규리그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