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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조세회피처 평가’ 서한 1월에 보냈는데… 정부 허송세월

입력 | 2017-12-07 03:00:00

10월에도 공식서한 다시 보내
정부, OECD만 믿고 안이한 대응… 기재부 담당국장 뒤늦게 현지파견
‘경제외교 참사’ 잇단 비판에도… 김동연 부총리 “심각하지 않다”
전문가 “내년 한국투자 위축 우려”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는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유럽연합(EU)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에 한국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진 6일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EU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대응이 안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EU가 올해 1월부터 블랙리스트 지정 작업을 시작해 대응할 기간이 열 달 넘게 있었지만 공식 문서를 최근에야 보내는 등 부적절하게 대응했다는 것이다.

주무 부처인 기재부는 부랴부랴 담당 국장을 유럽 현지에 파견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조세회피국이란 낙인이 찍힌 것 자체를 두고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경제외교 참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6일 기재부 등에 따르면 EU는 올 1월 한국 정부에 ‘조세회피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조세제도를 평가하겠다’고 공식 서한을 보냈다. 미국 등 92개국에 같은 내용을 통보했다. EU가 각국의 세금 제도를 평가해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 국가 명단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나라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이 비슷한 평가를 하고 있는데 왜 EU가 나서는가’란 문제 제기를 했다. EU는 올해 2월 “OECD와 G20의 평가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며 평가를 계속 진행했다.

9월 말 OECD와 G20이 “한국의 외국인 투자 세제 지원 제도는 문제가 없다”고 입장을 정리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외국인 투자 지역 등에 입주한 기업이 얻은 소득에서 외국인 투자 비율만큼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제도가 세금 탈루와는 거리가 멀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10월 24일 EU가 한국 정부에 “조세제도를 평가하겠다”며 재차 서한을 보내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벨기에 브뤼셀의 주EU 한국대표부에 나가 있는 재경관(기재부 출신 공무원)에게 ‘EU가 OECD 결정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2주 뒤인 11월 초 EU는 “독립기관인 EU는 OECD와 기준이 다르다”고 서한을 보냈다. 그제야 기재부는 EU에 “한국은 조세회피처가 아니다”라는 공식 서한을 보내는 등 대응에 나섰다. OECD의 판단만 믿고 있다가 발등을 찍힌 것이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기재부를 포함한 관계 부처에 EU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동향이 보고됐다. 익명의 정부 소식통은 “기재부는 사전 고지를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국제기구 업무 관례상 EU가 그렇게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정부가 안일하게 넘겼던 게 아닌가 싶다”고 귀띔했다.

기재부는 “EU에 조세회피처 명단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반영되지 않으면 OECD 등에 이번 지정의 부당성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번 찍힌 ‘조세회피처’ 낙인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미국 CNN,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세계 주요 언론들이 “한국이 조세회피처로 지목됐다”는 소식을 타전했다. EU는 2018년 중반에 중간 보고서를 내놓고 국가 명단을 갱신하겠다고 밝혔다.

EU는 조세회피처로 지목한 국가들에 대해 당장 제재에 나설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EU에서 조세회피처로 지정하면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할 때 EU 국가들이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 투자 금액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EU의 이번 조치에 문제가 있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만약 한국이 강대국이었다면 OECD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조세제도를 트집 잡아 조세회피국으로 지정하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세회피처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분위기가 강해지는 상황에 올 초부터 EU가 한국 정부에 수차례 서한을 보냈는데도 허술하게 대응한 책임을 피해 가긴 어려워 보인다.

세종=박희창 ramblas@donga.com·최혜령 / 신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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