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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의 몰락

입력 | 2017-11-26 16:44:00

짐바브웨 대통령 부인의 사치와 권력욕이 쿠데타 불러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부인 그레이스. 짐바브웨 헤럴드

100세까지 대통령을 하겠다던 세계 최고령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93) 짐바브웨 대통령이 부인 그레이스(52)의 야심과 사치 때문에 몰락했다. 짐바브웨 군부가 11월 15일 봉기한 것은 그레이스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6일 무가베 대통령이 제2인자인 에머슨 음난가과(75) 부통령을 해임하자 부통령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음난가과는 무가베가 37년간 독재 통치를 하는 동안 오른팔 구실을 해온 유력한 후계자였다. 음난가과는 무가베와 함께 1980년 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기여한 바 있다.

짐바브웨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숨지거나 사퇴하면 부통령이 3개월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는데, 그레이스는 그동안 호시탐탐 부통령 자리를 노려왔다. 그레이스는 부통령이 될 경우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군부에는 방위군 수장인 콘스탄티노 치웽가 장군 등 음난가과 전 부통령의 측근 세력이 대거 포진해 있다. 치웽가 장군 등은 그레이스가 자신들을 숙청하려는 의도를 보이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남편 이어 대통령 꿈꾼 ‘구찌 그레이스’


짐바브웨 사태는 2014년 그레이스가 집권 여당인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의 여성연맹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미 예견돼왔다. 무가베보다 41세 연하인 그레이스는 40, 50대인 당내 인사를 모아 ‘G40’이라는 계파를 만드는 등 본격적으로 지지세력을 구축해갔다. 특히 남편을 부추겨 차기 대권에 도전할 인물들을 제거해왔다. 무가베의 독립운동 동지인 조이스 무주루 전 부통령에게 대통령 암살 혐의를 씌워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후 그레이스는 노골적으로 대권욕을 드러냈다. 7월 한 행사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나. 나도 짐바브웨 사람인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1987년 22세 때 비서(타이피스트)로 일하면서 무가베와 눈이 맞아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당시 무가베의 부인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샐리는 신장암을 앓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공군 장교와 결혼한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불륜으로 자식 두 명을 낳았다. 무가베는 샐리가 숨지고 4년 뒤인 1996년 남편과 이혼한 그레이스와 호화판 결혼식을 올렸다. 그레이스는 2500만 달러(약 272억 원)에 달하는 저택을 고가 가구와 대리석으로 장식하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국민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에 고통받고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명품을 사들여왔다. 특히 구찌 제품을 좋아해 ‘구찌 그레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홍콩 등에 있는 수백만 달러짜리 호화 별장을 구매하기도 했다. 영국 런던의 고급 백화점 해러즈를 방문했을 때는 셔터를 내리고 혼자 쇼핑을 했고, 프랑스 파리에서 쇼핑할 때는 1시간에 7만5000파운드(약 1억830만 원)를 썼다. 지난해에는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135만 달러(약 14억7000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문했다. 거친 성격 탓에 여러 차례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9년 홍콩에서 자신을 촬영하던 영국 사진작가를 주먹으로 때렸고, 이후 싱가포르 등에서도 폭력 사건을 일으켰다. 8월에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한 호텔에서 아들을 만난다는 이유로 20세 여성 모델을 폭행해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세계 최장기 독재자였던 무가베는 그레이스 때문에 결국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 셈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독재자가 부인의 권력욕이나 탐욕 때문에 실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를 촉발했던 튀니지의 경우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의 부인 레일라의 탐욕이 재스민 혁명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재스민은 튀니지의 국화(國花)다. 재스민 혁명은 2010년 12월 17일 청과물 노점상을 운영하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로 시작됐다. 무허가 노점이라는 이유로 청과물 수레를 빼앗긴 채 경찰에게 구타당한 부아지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저항했고, 이듬해 1월 4일 숨졌다. 이에 분노한 튀니지 국민은 민주화 시위를 벌였고 23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독재자 벤 알리와 부인 레일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이후 재스민 혁명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독재 국가들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22세 연하인 두 번째 부인 레일라는 미용사 출신으로 호화 생활에 온갖 부정부패에도 개입하며 튀니지에서 최고 부자 가문이 됐다.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부인 레일라(왼쪽)와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부인 수전. 위키피디아



권력에 취해 사치 일삼은 독재자 부인들

벤 알리는 2009년 전립샘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하지만 레일라는 이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카르타고의 섭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친·인척을 요직에 앉혔다.

레일라는 특히 금을 좋아했다. 시위대에 쫓겨 황급히 나라를 떠나면서도 중앙은행에 보관 중이던 금괴 1.5t(6000만 달러 규모)을 챙겼다. 벤 알리가 튀니지 공항에서 사우디행 비행기를 타기 전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외쳤지만, 레일라는 남편에게 “어서 타, 멍청아. 난 지금까지 당신의 갖은 실수를 다 참아왔어”라며 비행기에 타게 했다고 한다. 레일라 일가가 경제를 쥐락펴락하자 튀니지 법원은 벤 알리와 레일라에 대한 궐석 재판에서 부패와 공공자금 유용 혐의를 적용해 징역 35년과 5000만 디나르(약 217억 원), 4100만 디나르(약 178억 원)의 벌금을 각각 선고했다.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부인 수전은 ‘레이디 맥베스’로 불렸다. 어머니가 영국 출신인 수전은 막후에서 무바라크를 움직이며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휘둘렀다. 집권 시절 이집트 학교 가운데 무바라크의 이름을 딴 학교는 388개, 수전의 이름을 딴 학교는 160개에 달했다. 수전은 자신의 차남 가말이 남편의 권력을 승계할 수 있도록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수전의 오빠는 무바라크 재임 기간 이집트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는 등 실세라는 말을 들어왔다. 수전은 남편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궁에서 울부짖으며 “내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민주화 시위와 시민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진 후 남편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도 수전은 은행 2곳에 입금해놓은 비자금 2400만 이집트파운드(약 14억7000만 원)를 국가에 헌납하고 혼자만 석방됐다.

사치를 일삼아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은 물론, 자신도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들’은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7년 111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