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국제부장
9월 24일 잠에서 깨어난 김정은에게 누군가 목숨을 걸고 이렇게 보고했을 것이다.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B-1B’ 편대가 풍계리 핵실험장 폭격과 자신에 대한 평양 참수작전 연습을 하고 돌아갔음을 파악한 영리한 독재자는 두 가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아, 멍청한 저놈(조선인민군)들만 믿고 있다간 자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제명대로 살려면 싫더라도 중국과 러시아를 무시하면 안 되겠구나.’
실제로 김정은은 9월 15일 이후 60일 이상 핵·미사일 전략 도발을 멈추고 있다. 17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를 시작으로 러시아 의원단을 잇달아 받아들이는 특유의 ‘방문 외교’를 시작했다. 아버지 김정일이 미국에 대한 도발 후 중국과 러시아 주요 인사들을 끌어들여 정세를 판단하고 시간을 끌던 고전적인 수법이다.
시 주석의 친서를 갖고 방문할 쑹타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러시아 하원의원들에게 김정은과 측근들이 물어볼 내용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과의 1.5트랙 대화에 참여했던 수잰 디마지오 뉴아메리카재단 국장 겸 선임연구원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전한 그들의 최근 궁금증은 이런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말 전쟁광에 미치광이냐 아니면 그런 시늉만 하는 것이냐? 정말 서울에 피해를 주지 않고 우릴 군사적으로 제압할 비결을 가지고 있는 거냐? 미국 민주당은 뭐 하나, 탄핵도 못 시키나? 오래가면 우린 어쩌지?’
이처럼 김정은의 스탠스를 꼬이게 만드는 트럼프의 비결은 역설적으로 생전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역대 미 대통령을 괴롭혔던 선군(先軍) 외교 전략전술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악명(惡名)과 전략적 모호성 유지’ 원칙도 마찬가지다. 트럼프가 전쟁광에 미치광이인지 그런 척하는 것인지 미국인들도 헛갈릴 정도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과 동맹국들에 무모한 군사 움직임을 보일 때 평양을 향하는 핵·미사일 버튼을 누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상대를 불확실성의 위협에 떨게 하는 트럼프의 군사 전략 개념은 이미 올해 8월 발표한 대(對)아프가니스탄 전략에서 나타났다. “적들(탈레반)이 우리의 계획을 알 수 없게 하겠다. 언제 공격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해 적에 대한 ‘기습’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올 때까지 버티곤 했지만 턱밑에까지 찬 유엔과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간부들은 달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배고픈 판문점 병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핵이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트럼프가 말해줬지 않나. 다음 달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꿈에 착한 유령 만나 진짜 깨달음 얻기를.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