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펀치드렁크 극단의 ‘맥베스’ 개작 연극 ‘슬립노모어’
연극 ‘슬립노모어’의 관객들이 연회색 가면을 쓴 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감상하고 있다. 펀치드렁크 제공
슬립노모어는 뉴욕시 맨해튼 남서부 첼시 지역의 매키트릭 호텔에서 2011년 3월부터 7년째 장기 공연 중이다. 매키트릭 호텔은 이름만 호텔로, 실제는 펀치드렁크가 오직 슬립노모어 공연을 위해 세 개의 낡은 창고 건물을 개조한 극장 공간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원작으로 히치콕의 필름 누아르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전통적인 연극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험’을 선사한다.
이 공연에는 객석이 따로 없다. 관객들은 최대 3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6개 층의 매키트릭 호텔 내 100개가 넘는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배우들은 대사 없이 오로지 안무로만 맥베스의 주요 장면을 연기한다. 관객들은 연회색 가면을 쓰고 배우들을 따라다니면서 연기를 구경하거나, 실내를 탐색하는 등 자유롭게 공연을 체험한다.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슬립노모어가 뉴욕에 이어 상하이에서까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디지털 시대에 신체적 상호작용이 줄어들면서 현실 세계에서의 강렬한 체험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슬립노모어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로지 공연 현장에 몰입하게 만든다. 공연 중 관객의 휴대전화 사용을 엄격히 통제한다. 말도 해서는 안 된다. 관객은 가면을 쓰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익명성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3시간 공연 내내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매 공연을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만의 공연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펀치드렁크의 공연을 계속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런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대학생 때부터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연극 방식은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고,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나는 관객들을 관객석의 안락한 장소에서 벗어나 어떤 내러티브를 따를지 자기만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세계로 이끌고 싶었다. 우리는 늘 관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우리 무대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는 관객이 극의 중심에 있을 때 어떻게 느낄지를 더 고민한다. 관객이 경험할 디테일을 굉장히 꼼꼼하게 신경 쓴다.”
―슬립노모어를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왜 공연에 대사를 활용하지 않나.
“대사를 쓰면 관객의 뇌가 심장보다 먼저 반응하게 된다. 말보다는 음악과 배우의 몸짓과 같은 언어가 관객들에게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면은 펀치드렁크의 트레이드마크다. 관객이 가면을 써야 하는 이유는….
“가면은 일차적으로 공연에서 관객과 배우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슬립노모어 공연에서 가면을 안 쓴 사람은 배우뿐이다. 더 나아가 가면은 관객에게 완벽한 익명성을 제공한다. 가면을 쓴 관객은 보다 자유롭게 마음대로 공간을 돌아다니며 행동할 수 있다. 가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온전히 자기 자신이 돼서 공연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금기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욕망을 따를 수 있게 만드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가면을 씀으로써 나머지 관객이 사라진 것처럼 느끼며 스스로 공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펀치드렁크는 슬립노모어가 고전 ‘맥베스’를 원작으로 했듯 유명한 고전을 각색한 작품을 주로 선보인다. 원작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
―펀치드렁크는 연극 외에도 글로벌 기업들과 협업해 다양한 예술 작업을 펼치고 있다. 어떤 기업들과 작업했나.
“우리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많은, 소수의 브랜드 파트너와만 작업한다.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공연장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많다. 루이뷔통, 플레이스테이션 등과 작업했다. 많은 브랜드들이 우리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접촉해 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기회를 제공하는 파트너와만 협업하고 있다.”
―국내 연극계에서도 이머시브 연극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는데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작게 시작하라. 펀치드렁크 이름을 내건 첫 번째 작품에서 배우는 4명, 관객은 단 20명뿐이었다. 우리는 우리 공연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수만 있다면 공연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도 진출할 계획이 있는가.
“상하이에서의 흥행을 보면서 새로운 극장 경험에 대한 중국 관객의 갈망이 엄청나다는 것을 확인했다. 공연을 올린 지 아직 1년이 채 안 됐는데 같은 공연을 100번 가까이 봤다는 열성 팬들도 있다. 우리는 공간과 건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한국에도 영감을 주는 적절한 공간이 있다면 당연히 슬립노모어 같은 가면극을 올릴 수 있다. 우리와 같이 작품을 제작할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제작자도 늘 찾고 있다.”
―이머시브 연극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하는가.
“우리 작품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증강현실 같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도 관심이 많다. 최근 미국에서 삼성전자 미국법인인 ‘삼성전자 아메리카’와의 협업으로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해 제작한 ‘빌리브 유어 아이스(Believe Your Eyes)’가 최초의 시도였다. 앞으로 다른 공연에서도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도전을 이어갈 것이다.”
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