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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확 바뀐 조선수군, 절이도 해전서 왜군에 본때

입력 | 2017-11-11 03:00:00

[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9>
19화: 절이도, 명량때보다 더 큰 성과




이순신의 마지막 수군통제영 기지가 있었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 현재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인 충무사가 들어서 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7300여 명의 군사와 60∼70척의 전선을 갖춘 막강한 조선수군을 키워내 마지막 전쟁을 치렀다. 고금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여름, 남해 바다는 폭염과 함께 전쟁 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7월 18일 왜군 군선 100여 척이 전남 고흥의 녹도(鹿島·녹동)로 침범해 왔다. 10개월여 전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남해안 곳곳에 축조한 왜성들에 칩거하며 민간인 약탈과 산발적인 도발로 시간을 끌어오던 왜군이 다시 대규모 침공에 나선 것이다. 녹도는 이순신의 수군 통제영이 설치된 고금도(완도군)와는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지점.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왜군의 의도적인 행동임이 분명했다.

통제사 이순신과 명군 도독 진린은 즉시 휘하 전선을 이끌고 녹도에서 10여 km 떨어진 금당도(고흥군 금일면)로 나아갔다. 임진·정유 7년 전쟁 중 처음으로 이뤄진 조명(朝明) 연합수군 작전이었다.

척후선으로 보이는 왜선 2척이 금당도의 연합함대를 보더니 급히 도주했다. 이순신은 밤이 깊어지자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전선 8척을 주어 절이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북서단 해역으로 나아가 매복하라고 지시한 후 금당도에서 밤을 새웠다. 절이도는 왜군에게 침범당한 녹도와 조명 연합수군이 머물고 있는 금당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한밤중 바람결에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튿날인 7월 19일 동틀 무렵 왜선 100여 척이 절이도 해상에 나타났다. 이순신은 직접 전투에 나섰다. 진린에게는 높은 데 올라가 전투를 지켜보게 하고, 자신은 판옥선을 거느리고 적진을 뚫고 나아갔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덮었다.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화포가 함께 발사됐다. 적선 50여 척을 잇달아 불태우고, 왜군 1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적이 본진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진린이 크게 기뻐하며 ‘가히 왕의 병한(屛翰·임금을 호위하는 울타리)이라 이를 만하다. 옛 명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하고 칭찬했다”(‘난중잡록’)

왜군의 시체가 절이도 바다에 가득해 조선수군이 다 챙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선조실록’의 이순신 장계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왜선 50여 척을 불태우고 왜군 수급 71급을 챙겼다. 왜선을 격파한 전과로 평가하자면 한산도해전(59척 분멸)보다는 작지만 명량해전(31척 분멸)보다는 큰 대승이었다.

이처럼 ‘절이도 해전’은 조명 연합수군이 참여한 첫 전투이자 완승을 거둔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이도 해전은 한중 양국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채 ‘잊혀진 전투’로 남아 있다.



이순신의 자립 경영술

절이도해전이 치러진 거금도 앞바다. 건너편으로 소록도가 보인다. 거금도=박영철 기자

절이도 해전은 이순신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조선수군 재건 과업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첫 성과였다. 1598년 7월의 조선수군은 정확히 1년 전인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의 조선수군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1년 전 수군 총사령관 원균은 거제도 칠천량 바다에서 150여 척의 판옥선과 1만3000여 명의 조선 수군을 잃어버렸다. 당시 조선 수군은 오합지졸이라고 할 정도로 어이없는 패배를 했다. 이후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12척의 판옥선만으로 명량해전을 비롯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왜군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벌이면서 수군 재건에 절치부심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단 1년 만에 판옥선 60∼70척, 병력 7300여 명의 강군으로 성장했다.

이는 이순신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목포 고하도와 완도 고금도의 수군 진영에서 발휘한 그의 리더십과 경영술은 후세의 경영전략가들도 모범 사례로 꼽을 정도다.

명량해전 승전 직후 서해로 이동했던 이순신은 다시 남하해 108일간(1597년 10월 29일∼1598년 2월 16일) 목포 고하도에서 겨울을 보냈다. 당시 보화도로 불렸던 고하도는 서북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어서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배를 감추기에 적합한 지형이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이곳에서 수군 기지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새 통제영 건설과 전선(戰船) 건조 작업을 감독했다.

이순신의 현실적 경영능력은 이 기간에 빛을 발했다. 당시 군량미 확보 및 전선 건조, 군수물자 확보 등을 위한 전비(戰費)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조선 조정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지원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의온 등 참모들과 궁리한 끝에 ‘해로통행첩’을 발행하기로 했다. 3도(전라·경상·충청) 연안을 통행하는 모든 배는 통행첩이 없을 경우 간첩선으로 간주해 이동을 금지하되, 통행첩을 소지한 배는 통행과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치였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쌀을 받고 통행첩을 발급해 주었다.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을 받았다. 당시 피란선들은 모두 재물과 양식을 싣고 다녔기 때문에 그 정도 쌀을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게 다닐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순신은 불과 10여 일만에 1만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유성룡의 ‘징비록’)

당시 이순신의 수군을 졸졸 따라다니며 안전을 보장받고 있던 수백 척 규모의 피란선들은 기꺼이 이순신을 도왔다.

이순신은 또 당시 비싼 값에 거래되던 소금 장사에 뛰어들었다. 이순신은 고하도에 오기 전 잠시 머물던 신안의 안편도(팔금도)에서 염전을 개발해 군량미에 보태 썼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해의 13개 섬에서 염전을 개발하고 감독관을 파견하는 등 소금 사업을 직접 관리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확보한 돈으로 당시 1000여 명에 달한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하고, 40척의 전선을 새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고하도에 주둔한 108일간 조선 수군의 군세는 날로 커져갔다. 해가 바뀌어 봄으로 접어든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완도의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고금도는 여건이 한산도보다 더 좋았다. 농지도 넉넉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주민도 1500여 호나 되어 둔전(屯田)이 가능했다. 이순신이 둔전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피란민이 속속 고하도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식량을 자체 조달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조정 대신 이덕형은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에서 이렇게 전했다.

“신이 본도(전라도)에 들어가 해안가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이순신)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했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해, 겨우 3, 4개월이 지났는데도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선조실록’)

당시 고금도는 7년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예외적인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먼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고금도로 찾아와 집을 지어 살거나 막사를 만들어 장사를 했다.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섬이 모자랄 지경이었다.(‘징비록’) 또 고금도의 웅장한 군영은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했다.(이충무공전서의 ‘선묘중흥지’)



명군의 戰功 가로채기

이순신이 고금도에 통제영을 차린 데는 숨은 뜻도 있었다. 수로로 120여 km 떨어진 순천 왜교성의 왜군을 겨냥한 조치였다. 당시 호남 지역의 왜군은 순천 왜교성의 지휘자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낙안, 순천 방면에 집결해 있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런 즈음에 명나라 수군까지 합세했다. 진린은 1598년 7월 16일 수군 5000명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했다. 그 이틀 후, 때마침 왜군 쪽에서 먼저 도발해와 절이도 해전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절이도 해전에서 명군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명의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먼바다로 피해 들어가 하나도 (왜군의 수급을)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를 보고는 진도독(진린)이 뱃전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신 등에게도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마지못해 40여 급을 나눠 보내줬습니다. 계유격(명군 유격장 계금)도 가정(家丁)을 보내 수급을 구하기에 신이 5급을 보냈습니다.”(‘선조실록’)

진린은 조선 수군의 군공(軍功)을 자신의 전과로 가로챘다. 또 이를 위해 이순신에게 거짓 장계까지 꾸미도록 강요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원하는 대로 조선 수군이 26급을 벤 것처럼 가짜 장계를 작성해 보고했다. 상벌에 관한 한 엄격한 원칙주의자인 이순신이었지만 명군과 연합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원칙을 양보해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명군 감찰을 맡은 참정(參政) 왕사기가 남쪽에 내려와 군공 가로채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조선 조정에 이순신이 작성한 진짜 장계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이순신이 나중에 따로 사실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면, 진린은 명의 황제를 속인 큰 죄를 지어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조명 연합수군 전력에도 큰 차질을 빚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선 조정은 가짜 장계를 진짜라고 하며 보내 유야무야 처리했다.(‘선조실록’)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조선 측은 절이도 해전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못했다. 사료마다 절이도 해전 날짜가 일치하지 않고 해전 성과도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당나라 군대’의 행패와 약탈

명 장군 휘하 병사들의 행패도 극심했다. 영의정 유성룡은 진린 부하들의 행패를 직접 목격했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察訪·사신 접대 등을 담당하는 지방관)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말도 듣지 않았다. 나는 여러 대신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패할 것 같소이다. 진린은 장수의 권한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고, 군사들 또한 제 마음대로 다룰 것이니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하고 말했다.”(‘징비록’)

명군은 전쟁기간 내내 천자국에서 제후국을 구원하러 왔다는 우월감으로 조선군을 깔보고 함부로 대해왔다. 명군 장수들은 조선의 임금도 면전에서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의 신하들을 마치 하인 부리듯 대했다.

명군이 조선군보다 전투를 잘한 것도 아니었다. 흔히 공격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만 하는 군대, 군기가 빠져 군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사들을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데 정유재란 때의 명나라 군대가 그랬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거쳐 중국 명나라로 쳐들어가는 행위를 ‘가라이리(唐入り·당으로)’라고 했고, 명군을 당군(唐軍)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 때부터 왜군의 패악을 목격해온 유성룡은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는 말을 남겼다.(‘징비록’)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데 있어서 왜군이 얼레빗처럼 훑어갔다면, 명군은 날이 촘촘한 참빗처럼 훑어가버려 남아나는 게 없다는 조선 사람들의 한탄이었다.

명군 접반사 이덕형은 1597년 겨울 울산성 전투를 치른 후 곧바로 난병(亂兵)으로 돌변한 명군들의 행태에 분노를 느꼈다.

“마초(馬草)를 벤다고 핑계대고는 여항(閭巷)으로 흩어져 나가서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간하고 있으므로 원근이 모두 풍문만 들어도 도망쳐 숨기 바쁩니다. 사방 30∼40리 안에는 인가(人家)가 모두 비어 있어 보기에 매우 놀랍고 참혹한 상황입니다.”(‘선조실록’)

명군들의 재산 약탈과 살인, 여성 겁탈 등은 침략군인 왜군들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명군은 전쟁 기간 내내 조선을 도와주는 구원군이면서도 점령군이라는 이중적인 행태를 띠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조조차 꺼릴 정도로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진린이 절이도 해전 후 이순신에게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명군의 태도는 이순신이 정유재란을 끝내는 마지막 전투에서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거금도(고흥군)=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