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시절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많이 준 미국인 전문가에게 점심을 대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대화 내용.
전문가: “한국어로 ‘오판’이 무슨 뜻이에요?”
특파원: “예? (속으로 잘못된 판단이라는 뜻의 ‘오판(誤判)’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이 사람이 구사할 리는 없다는 생각에)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전문가: “(싸이의 히트곡) ‘강남 스타일(Kangnam Style)’에 나오는 첫 단어잖아요.”
‘강남 스타일’에 등장하는 첫 가사는 “오빤 강남스타일”입니다. 강한 발음, 센 발음에 취약한 미국인답게 ‘오빠’를 ‘오파’라고 발음했던 겁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해줬습니다. 왜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전문가가 ‘강남 스타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만큼 ‘강남 스타일’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오빠’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있을까 하고 ‘어번 딕셔너리(Urban Dictionary·도시의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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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페루에서 열린 ‘빅뱅’ 공연 시작 전 모인 팬들.
‘강남 스타일’은 물론 미국에서 한류의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취재하다 알게 된 ‘코리아 드라마 클럽’의 미국인 회장은 한국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줄거리를 줄줄 외우며 “한국 드라마는 너무 ‘채벌’(‘재벌’의 미국식 발음)이 자주 등장한다”는 비평까지 곁들였습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우연히 알게 된 미국 여성은 “(한국 배우) 이민호의 최고 팬이다. 이민호랑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좋겠다”라며 한국에 관광가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습니다.
2012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민호 팬미팅 현장.
몇 년 전 중남미의 한류 취재를 위해 멕시코를 갔더니 그 곳에서는 미국보다 훨씬 강한 한류 붐이 일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면 먼 땅인 멕시코에서 만난 소녀들의 입에서 ‘빅뱅’ 멤버들의 이름이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멍한 기분입니다.
다만 요즘 한류가 위축됐다는 평이 많습니다.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죠. 미국에서 봤을 때 대다수 한국 드라마는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고, K팝 가수들은 비슷한 리듬에 맞춰 칼 군무를 추는 집단이 적지 않아서죠. 미국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규격화된 오락문화를 전 세계에 수출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인종적 경험을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문화 창작물을 만들어 냅니다. 한류가 오래 번영하려면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