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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전쟁 세대’ 헵번의 첫 요리는 원기회복용 으깬 감자

입력 | 2017-08-26 03:00:00

◇오드리 앳 홈/루카 도티 지음·변용란 옮김/268쪽·2만4000원·오퍼스프레스




갓 태어난 루카 도티를 품에 안고 있는 오드리 헵번. 오퍼스프레스 제공


거창하고 화려한 여배우의 삶을 담은 전기가 아니다. ‘오드리 헵번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말로 책은 시작한다. 헵번의 아들인 저자는 기자들이 몰려들면 “잘못 알았나본데, 전 도티 부인 아들이거든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루카 도티에게 헵번은 평범한 어머니였고, 사랑스럽지만 절대 신기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오드리 앳 홈’은 집에서 요리를 하고 정원을 가꾸던 가장 평범한 순간의 헵번을 보여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베어 물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듯, 가장 사소한 순간에 진실이 드러난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일상은 헵번이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벨기에 태생의 헵번은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아버지는 사라졌고 친척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강제 추방됐다. 먹을 거라곤 쐐기풀과 튤립뿐이었다. 16세이던 그녀의 키는 168cm였지만 몸무게는 39kg에 불과했다. 영양실조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헵번은 그 시절을 이렇게 설명했다. “부종이 발에서 시작해 심장에 이르면 죽는 거란다. 나는 발목 위까지 왔는데, 그때 해방이 됐어.”

헵번은 살아남은 걸 기적으로 여겼다. 전쟁을 잊은 적이 없었고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혜택은 뜻밖의 선물처럼 반겼다. 영화와 성공도 중요했지만 가족과의 시간, 텃밭에 시시때때로 피어오르는 식물들을 그녀는 더 사랑했다. 그런 헵번의 첫 레시피는 네덜란드식 휘츠폿. 감자 당근 양파 등을 삶아 으깨 퓌레 형태로 만든 원기회복용 요리다.

아들이 부엌에서 발견한 헵번의 낡은 레시피북에는 야심찬 요리법이 적힌 페이지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요리들은 결코 식탁에 오른 적이 없었다. 도티는 “인생에서나 주방에서나 어머니는 중요한 것만 남겼고 쓸데없는 것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패션 디자이너 발렌티노와의 식사부터 남편 도티와의 결별까지. 책은 헵번 인생의 순간들을 미공개 사진과 함께 담담하게 그린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레시피로 마무리된다. 설탕 100g과 소금 5g을 물 1L에 녹인 수액. 젊은 의사가 개발한 이 레시피는 1968년부터 5000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굶어 죽는 아이들의 실상을 알려 세상을 감동시킨 그녀의 마지막 레시피는 ‘경구 수분 보충 요법’이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