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종묘 절도사건’ 때 분실, 이완용 차남 소속 기관이 다시 제작…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 처음 알려져 문화재청 작년말 복제품 확인… 8개월 넘도록 공개 않고 쉬쉬
2년 전 미국 시애틀미술관에서 환수됐지만 모조품으로 드러난 덕종 어보(위 사진)와 어보의 종묘 도난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자 2면 기사. 문화재청 제공·동아일보DB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18일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 간담회에서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덕종과 예종 어보 5과를 도난당한 사실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알게 됐다”며 “성분분석 결과 덕종 어보 등 4점의 구리 함량이 70%를 넘어 15세기에 제작된 다른 어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5세기 조선시대에 제작된 어보들은 모두 금 함량이 최소 60% 이상이다.
1924년 어보 도난 사건은 그해 4월 12일 동아일보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종묘전(宗廟殿) 내(內)에 의외사변(意外事變)…덕예(德睿) 양조(兩朝)의 어보를 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조 오백년 역대 왕들의 사위(祠位)를 봉안한 종묘에 도적이 들었다”며 “책임자가 되는 예식과장 이항구가 살펴보니 과연 덕종과 예종 신위 앞에 놓여 있던 어보가 사라졌다”고 썼다. 이항구는 을사오적 이완용의 둘째 아들로, 이왕직에서 어보 관리를 책임지는 예식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종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지만 범인과 어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이에 이왕직은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제작을 의뢰해 어보 모조품 5과를 종묘에 안치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순종 지시로 이왕직이 제작해 종묘에 정식으로 봉안했기 때문에 모조품이 아닌 ‘재(再)제작품’이 맞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상황에서 이 어보를 만든 주체가 사실상 총독부이고 금 함량도 떨어지는 조악함을 감안할 때 조선왕조 때 만들어진 재제작품과는 격이 다른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