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경제부 차장
정치나 세금이나 결국 선택의 문제다. 조선시대 공납 같은 착취가 아니라면 정치적 결정에 따라 세 부담을 적절히 나눠 짊어지는 게 현대적 의미의 나라살림이다. 없던 세목도 신설하는데 소득·법인세율 정도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나라살림 사정, 글로벌 흐름에 맞춰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그런 의미로 보면 새 정부의 대기업·초고소득자 세율 인상을 무조건 비판할 건 아니다. 증세를 빼면 뾰족한 복지재원 마련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문가,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동의한다. 해외에선 관련 선례도 꽤 있다. 프랑스(5%포인트) 미국(4.6%포인트)이 2010년대 들어 소득세 최고세율을 올렸고, 칠레(7%포인트) 멕시코(2%포인트)는 법인세율을 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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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과 서민 증세는 전혀 없다”고 문재인 대통령은 선을 그었지만 이들의 협조 없이 재원 마련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당장 걷자는 게 아니다. 증세에도 순서가 있다. 초고소득자 지갑에 손을 댔으니 고소득자, 중산층, 서민 순으로 더 내면 된다.
세율 인상보다 비과세 감면 정비가 우선이니 ‘고소득자 감면’을 줄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침 한국에는 소득이 높을수록 세금을 많이 깎아주는 ‘부자 감세’가 있다. 연소득 1000만 원 이하 서민은 고작 5만 원 환급받는데 연봉 10억 원 초과 부자는 115만 원을 돌려받는 제도다. 소비가 많고 소득이 높을수록 환급액이 커 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바로 ‘신용카드 소득공제’다.
애초 도입 목적은 자영업자 소득 양성화였지만, 카드 사용이 정착돼 효과가 유명무실해졌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연 공제 규모가 1조8163억 원(2015년)이니 이것만 줄이거나 없애도 웬만한 명목세율 인상보다 세수 확보에 보탬이 된다. 고소득자일수록 늘어날 부담이 커 ‘조세정의 실현’에도 부합한다. 어차피 급여 1000만 원 이하 저소득자의 92%가 카드 사용액이 적어 공제를 못 받을 정도로 서민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신용카드 공제에 손을 대자고 말할 용기 있는 정치인이 있을까. ‘연말정산 때 뭘 돌려받나’ ‘월급생활자가 봉이냐’라는 비판 여론이 두려울 것이다. 제도의 맹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납세자를 설득해야 하겠지만, 정치권과 정부에 그런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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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