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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나의 정의, 너의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

입력 | 2017-07-19 03:00:00

정의란 타협의 산물이다
‘내 정의만 옳다’ 독선 대신 ‘공동의 정의’ 이끌어내야
뒷감당 힘든 최저임금 인상 등
도덕적 당위 앞세워 밀어붙이면 정의로운 사회 앞당길 수 있나
정의과잉 시대의 전철역 안내판 ‘승차는 정의롭게, 여행은 자유롭게




고미석 논설위원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맞히면 상을 준다는 말에 중1 소년은 자신 있게 답을 써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정의(正義)다. 사람이 의롭게만 살면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답변에 의기양양했으나 실망스럽게도 2등에 그쳤다. 1등은 ‘사랑’이라 답한 3학년생 차지였다. 분했다. 왜 정의보다 사랑인가? 공자 말씀 같은 정답을 납득할 수 없었다. 상품으로 받은 성경책에 적힌 2등을 지우고 1등으로 고쳤다.

그 굽힐 수 없던 확신에 변화가 생긴 것은 한참 뒤였다. 가난하고 몸 약한 자신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아무 대가 바라지 않고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얻은 깨침이었다. ‘예수는 정의가 아닌 사랑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 8년이 걸렸다’고 회고하는 그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다. 이 97세 철학자는 최근 정의의 본질에 관해 이런 글을 썼다. 수학과 달리 사회과학은 하나의 물음에 다양한 해답이 나올 수밖에 없고 정의 역시 그렇다는 것. 오늘 우리가 정의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조언이다.


원로의 말씀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또 하나의 폭염처럼 쇄도하는 ‘정의의 폭주’ 때문이다. 미2사단 100주년 콘서트 파행,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 취소,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등. ‘정의’란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국인의 오래된 본능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사안을 정권과 시민운동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리고 있다.

치밀하게 전개되는 이 시리즈의 공통점은 ‘내 식대로 정의’를 밀어붙이는 열기다. 예전에 출판시장에서 정의 열풍이 불붙더니, 요즘 다시 대한민국의 화두처럼 떠올랐다. 저마다의 정의를 내세우며 국가공동체의 대의를 뿌리째 뽑아 올리는 형국이다.

예정된 공연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만든 것도 자칭 정의 실현이 빌미였다. ‘2002년 효순 미선 양 사고를 일으킨 부대’라는 조직적 반발은 “6·25전쟁 때 미 본토에서 출병한 첫 번째 부대”라는 상식에 한판승을 기록한다. 박정희 우표 논란도 비슷했다. ‘국가를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점은 역사적 사실’이란 일반적 평가는 ‘독재자 미화’란 한마디에 간단히 꺾인다.

최저임금 인상을 국민 세금을 투입해 감당하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은 정의로 포장된 공약이지만 이를 현실화할 때 일부 수혜자를 제외하고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모르거나,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일단 정의의 깃발을 앞세우면 반대 의견은 설 자리가 없다. 이것이 과연 정의일까.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는 ‘정의는 타협의 산물’이라 믿는 사람인데, 2년 전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타협을 신뢰한다. 적에게 다른 한쪽 뺨마저 내밀어 부당한 처사를 받아들이는 쪽이 아니라 중간 지점 어디에선가 상대와 만나는 쪽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는다.”

최근 번역된 저서 ‘광신자 치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광신주의란, 나만이 옳다는 생각으로 타협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와 다른 점은 그 과정에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탈레반도, 테러집단 이슬람국가(IS)도 그들이 믿는 정의의 이름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에서 독점적 배타적 정의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약의 오남용이 몸에 해롭듯이 정의의 오남용이 미치는 해악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한 시기다. 분노와 원한에서 출발한 경직된 정의가 아닌 열린 정의가 올바른 처방전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저서 ‘정의와 정의의 조건’에서 ‘나만의 정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정의’를 강조했던 이유다. 극단의 정의가 극단의 손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다.

정의로 가는 길은 타협과 자기반성에서 시작된다. 대선 승리의 완장을 언제까지 휘두르면서 ‘나만의 정의’를 위해 가뜩이나 허약한 사회를 격하게 흔들고 급하게 몰아붙일 건가. 이제는 진영논리에 관계없이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과 다양한 가치를 수렴한 ‘공동의 정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찢긴 공동체가 아니라 더 나은 공동체라면 말이다.

정의란 말이 흘러넘쳐 일상에서도 정의 과잉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며칠 전 전철역 안내판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승차는 정의롭게. 여행은 자유롭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