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보도로 본 ‘박열의 항일 투쟁’ 동아일보 기자 직접 면회하며 취재… 1923년 10월 18일자에 첫 기사 옥중결혼 소식도 속보로 전해… 1926년에만 관련보도 168건 ‘흑도회 창립’도 동아일보 통해 확인
박열의사기념관이 전시하고 있는 동아일보 1926년 8월 30일자에 실린 ‘박열의 옥중가’. 박열이 아내 가네코 후미코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동아일보가 1926년 8월 3일자로 보도한 박열의 ‘옥중가(獄中歌)’다.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박열(1902∼1974)이 감옥에서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이 주말까지 180만 관객을 넘은 가운데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박열의 얼굴을 더듬어봤다.
“기자는 그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시곡(市谷·이치가야) 형무소를 방문했다. …박열은 뜨거운 악수로 기자를 맞으며 ‘이렇게 자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본 신문은 나에 관한 기사로 우스운 말이 나돌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정(鄭)이란 사람의 소위란 것이 확실하며….”
박열, 가네코 후미코 부부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1926년 3월 2일자. 부부는 각각 사모관대와 한복 저고리 차림으로 법정에 섰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박열 사건의 첫 소식을 1923년 10월 18일자로 전했고, 총독부의 보도 통제가 해제된 1925년 11월 25일자 2면 머리에 “‘대중의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이라는 기사를 통해 박열의 혐의와 이력, 불령사의 성격 등을 보도했다. 박열의 정신감정 거부나 옥중결혼 소식도 속보로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공판이 열린 1926년에만 박열 관련 소식을 168건이나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1926년 1월 1일자로 실은 박열의 옥중시(獄中詩)에서는 항일운동가로서의 단단한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옥창(獄窓)의 겨울밤은/이슥히 깊었는데/찬 기운은 살을 어이고//…//고르지 못한 이 세상/생지옥의 이 세상/아! 원수의 생지옥//….”
박열 등이 조직한 ‘흑도회’의 창립을 공식 확인할 수 있는 통로도 동아일보 지면이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연구한 김명섭 단국대 박사는 “흑도회가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진상 조사한 일도 함께 조사한 이상협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의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