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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휑한 가슴 채우려 ‘부엌서 홀짝’… 딱 한잔이 어느새 한 병

입력 | 2017-07-10 03:00:00

자신도 모르게 술독에 빠지는 여성들




“항상 ‘한 잔만’으로 시작해요. 정신을 차리면 술병이 수없이 나뒹굴고 있죠. 자괴감을 잊으려 또 술을 찾고….”

자신의 음주 경험을 털어놓던 40대 여성이 목이 잠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4일 경기 부천시 원미구의 여성 알코올질환 전문 W진병원 세미나실에 둘러앉은 입원 환자 8명은 중독에 이르게 된 각자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팔짱을 낀 채 메모지에 낙서를 하던 환자도 어느새 동료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여성 알코올질환자는 남성과 달리 수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도 스스로 증상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남성과는 확연히 다른 중독의 양상을 파악하는 게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조언했다.

○ ‘빈 둥지’에서 시작되는 중년 알코올 의존증

최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한 50대 여성 환자가 처음 술잔에 입을 댄 것은 ‘빈 둥지 증후군’이라 불리는 주부 우울증 탓이었다. 학부모회장을 맡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외아들을 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키웠지만 대학 진학 후 집이 휑해지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알코올질환으로 병·의원을 찾은 50대 여성은 2004년 1460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441명(2.4배)으로 크게 늘었다. 40대 여성 환자가 같은 기간 36.7% 늘어난 것과 대조적이다. 양재웅 W진병원장은 “중년 여성 알코올 질환자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별도 질병분류번호가 있는 ‘화병(火病·우울과 분노를 억누를 때 생기는 질환)’ 증세를 동시에 나타내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 젊은 여성에게 술 권하는 사회

전체 여성 알코올질환자 중 20, 3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35.4%로 같은 연령대 남성 알코올질환자 비중(15.4%)의 2배가 넘는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취업과 사회 활동이 늘면서 예전보다 더 자주 강한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더 많은 술자리를 경험하는 점, 주로 고용 형태가 불안정하고 감정 노동이 심한 서비스직인 점을 원인으로 꼽는다. 과일소주 막걸리 등 저도수 주류 시장의 확대가 젊은 여성 환자의 증가에 일조했다는 분석도 많다. 술 광고의 변천을 살펴보면 2000년대엔 노출된 신체를 강조한 ‘섹시 여가수’ 모델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엔 귀엽고 편안한 이미지를 내세운 20대 초반 남녀 연예인이 기용된다는 얘기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처럼 젊은 여성 소비자를 겨냥한 술 광고가 많은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말했다.


○ ‘여자가 웬 말술을’ 편견 탓에 ‘혼술’

여성 환자 중에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소셜 드링킹’보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키친 드링킹’으로 증상을 키운 이가 많다. 여성의 음주를 부도덕하다고 치부하는 옛 시각 탓이다. 게다가 과음 후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남성보다 드물어 주변 사람들이 알코올 의존 증상을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술에 취한 채 부상을 당해 병·의원에 실려 올 정도라면 알코올 의존 증상이 심각해 입원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가 불충분한데도 ‘아내(엄마)가 없으니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여성 환자를 무리하게 퇴원시키려는 가족들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 우울증에 ‘와인 한 병’ 자가 처방

한 30대 여성 환자는 대학 시절 한 남자 선배가 기숙사 방 열쇠를 몰래 복사해 침입한 뒤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던 사건을 계기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고소한 끝에 해당 남성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여성은 알코올 의존증을 얻었다. 이처럼 여성은 충격적인 사건을 잊거나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 갖고 있던 질환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알코올을 마치 치료제처럼 자가 처방하다 의존 증상이 나타나는 일이 흔하다. 남성 환자는 회식 등에서 술을 자주 마시다 알코올 의존에 이르는 사례가 많은 것과 대조적이다.

○ 여성의 몸, 알코올에 더 취약

알코올에 중독되면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관장하고 충동적 행동을 제어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현격히 떨어진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체내에 지방이 많고 수분이 적은 데다 알코올탈수효소(ADH) 등 해독에 필요한 물질이 부족하다. 따라서 술을 조금만 마셔도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져 뇌가 오랜 시간 영향을 받는다. 여성 환자에게 “술을 끊지 못하는 건 의지가 부족해서다”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팔이 부러진 환자에게 팔굽혀펴기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유가 있을 정도다.

20, 30대 임신부의 음주는 ‘태아알코올증후군’으로 연결될 수 있다. 임신했는데 술을 마시면 태아의 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출생 후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체격이 정상아보다 작을 수 있다. 지적장애 아동보호시설에서 발병 원인을 조사한 결과 14%가량이 태아일 때 알코올에 노출됐다는 국내 연구 결과도 있다.

 

:: 자문의사 명단 가나다순 ::

강웅구(서울대병원) 이동우(상계백병원) 이해국(의정부성모병원) 한창수(고려대 안산병원) 교수(이상 정신건강의학과), 양재웅 여성 알코올질환 전문 W진병원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조유라 인턴기자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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