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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찬란하게 홍석천

입력 | 2017-06-16 10:20:00


배우, 커밍아웃 1호 연예인, 레스토랑 사업가 그리고 이태원 건물주. 많은 것을 해냈다. 그런데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 꿈꾸는 남자, 홍석천이다.


지난 대선후보 토론회 때, ‘동성애’가 화두에 올랐다. 당시 대선주자 신분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방송 토론회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로부터 군대 내 동성애와 동성애에 관한 잇단 질문을 받고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하면서 시작이 됐다. 논란이 일자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의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 군대 내 동성애 허용도 성희롱, 성추행의 빌미가 될 수 있어 반대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단체는 문재인, 홍준표 당시 대선후보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고, 이튿날 문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를 찾아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방송인 홍석천(47)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커밍아웃 1호 연예인으로 활동중이니까.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이후 자신의 SNS에 이번 논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올렸다. 그런데 그의 글에 담겨 있는 것은 서운함도 비판도 아닌 ‘위로’였다. 그는 자신이 커밍아웃을 했던 17년 전을 떠올리며 “대선후보자 토론 방송에서까지 동성애 문제가 이슈화될 정도니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시대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최초의 커밍아웃 연예인으로서, 소리 없이 울고 있을 성소수자들에게 전한 그의 진심이었으리라. 홍석천은 자신이 개척한 길을 그렇게 홀로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최근 〈 찬란하게 47년 〉(스노우폭스북스)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연예인이면서 성소수자, 세입자면서 건물주이기도 한 그의 영화 같은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이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그를 만난 곳은 서울 이태원동에 자리한 루프탑 라운지 ‘마이스카이’. 서울 이태원을 기반으로 10개 넘는 레스토랑을 차린 그가 얼마 전 새로 마련한 공간이다. 오픈한 지 한 달이 채 안된 곳이지만, 저녁 8시경 이곳은 ‘트렌드세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루프탑에서 한눈에 보이는 남산타워 야경이 특히나 운치 있게 느껴졌다.

야경이 멋진 곳이네요.
그렇죠? 루프탑에 한 번 올라오신 손님들은 다들 무척 좋아하세요. 앞으로 이 앞에 용산공원이 조성되면 밤낮으로 아름다운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는 거죠. 아, 여기 제가 올린 건물이에요(웃음).

건물주가 된 게 처음인가요.
2012년에 낡은 건물 하나를 매입했어요. 그곳에선 지금 디저트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죠. 매달 세입자의 설움을 느끼고만 살았는데 직접 건물주가 되니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번엔 건물을 직접 올린 거라 그때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 같아요.

이태원 하면 홍석천을 떠올리게 된 지 오래예요. 항간엔 이태원 월세가 이렇게 뛴 게 홍석천 씨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휴, 그 얘기를 하자면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홍석천이 다 살려놨으니 이태원 상권에 뛰어들면 무조건 대박”이라고 홍보를 하는 통에 시세가 치솟았어요. 그 바람에 제가 내야 하는 월세도 덩달아 올라 잘 되던 가게를 접은 적도 있어요. 권리금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죠.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다 보니 어디다 하소연도 못했어요.

이 건물의 세입자는 구했나요.
패션 일을 하는 젊은 친구들이 1, 2, 3층에 들어왔어요. 홍석천 인생의 첫 번째 세입자인 셈이죠. 그 친구들이 정말 잘 되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레스토랑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셨나 봐요.
연예인이 요식업을 하면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물론 장사가 잘 되었으니 그동안 돈을 많이 번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수입이 많은 만큼 지출도 많아요. 가게의 작은 소품에 드는 돈부터 인테리어, 직원들 월급, 가게 확장에 드는 돈까지 생각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이쪽 매장에서 난 수익으로 다른 쪽 매장의 적자를 메우는 식이에요.

엄살 같은데요? 계속 레스토랑 수를 늘려가고 있잖아요.
저한테 레스토랑은 일종의 작품 활동 같은 거예요. 가게를 하나하나 낼 때마다 그곳의 인테리어, 소품, 메뉴, 식재료 같은 것을 고민하고 구현해내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든요.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장사는 할 수 있겠지만, 저는 ‘비즈니스맨’이 아닌 ‘아티스트’로 남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가게를 오픈할 때마다 행복해요.

가게도 열고, 책을 내셨더라고요.
원래는 커밍아웃 15주년 기념으로 2년 전에 내려고 했던 건데 그때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내지 못했어요. 나이 쉰이 됐을 때 낼까도 고민했는데, 50대 때 내는 거랑 지금 내는 거랑은 기분이 완전히 다를 것 같더라고요. 저는 스스로를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이봐요, 손가락질 당하던 홍석천이 이만큼이나 성공했다고요”하고 자랑하고 싶었죠.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 힘든 청춘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어요.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공항이요. 커밍아웃 인터뷰를 한 직후에 예정된 일정대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선수단을 응원하러 갔었거든요. 귀국하던 날, 수십 명의 기자들이 인천공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기자들 사이에 아버지가 보이는 거예요. 혹시라도 제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지켜주려고 나오신 거죠. 기자들이 몰려드는데 아버지는 저를 안고 “우리 석천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 물러서세요!”하면서 소리를 치셨어요.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언론에 커밍아웃을 하기 전까지, 부모님은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건 대학생이 된 후였어요. 저 역시 혼란스럽고 힘들었죠. 식구 중 누군가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먼저 큰누나에게 사실을 털어놨는데, 누나가 며칠을 울더니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자”고 하더라고요. 두 분 충격이 너무 커서 건강이 나빠질까 걱정된다면서요. 시트콤 〈 남자 셋 여자 셋 〉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서른에 언론 인터뷰를 했고 직후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말씀드렸어요. 내일 기사가 나올 거라고요.


2008년에 누나의 아이들을 입양했잖아요. 아빠로서의 삶은 어때요.
엊그제 어버이날, 되게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성인이 된 딸아이가 월급을 모아서 산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만년필을 주더라고요. 손편지랑 함께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뭉클했다고나 할까요. 그날 하루 종일 만년필을 들고 다니면서 어버이날 선물 받았다고 자랑하고 다녔어요.

어쩌다 누나의 아이들을 입양한 건가요.
작은누나가 이혼을 하면서 아이들 문제로 고민이 많았어요. 아이를 키우다 나중에 생부가 친권을 주장하면 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생부의 친권 포기 각서를 받으려면 법적인 입양자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서기로 했던 거죠.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필리핀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제 일을 돕겠다며 미국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한 딸은 지금 제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일을 배우고 있고, 아들은 미국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에요.

커밍아웃을 한 유명인 아빠로서 속앓이를 한 적은 없나요.
아이들에게 미안한 게 많았어요. 제가 보통의 연예인이었다면 아이들이 “우리 삼촌 연예인이야” 하고 자랑도 할 수 있을 텐데, 커밍아웃을 했으니 오히려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을 거예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제가 가지 않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일일 것 같아서 일부러 핑계를 대곤 했죠. 왜 안 오냐고 연락이 오면 “촬영이 있어. 미안해”하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참 많이 울었어요.

지난 대선후보 토론 때 문재인 대통령의 동성애 관련 발언이 이슈가 됐어요.
솔직히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이해는 해요. 사실 그런 자리에서 ‘동성애’와 같은 문제를 논하는 건 애초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봐요. 그 시점에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 자체가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거잖아요.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기습 시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친구들에게 “뭐 하러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대응을 했니. 그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던 상황도 이해해야 하지 않겠니”하고 문자를 보냈어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나아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지만,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천천히 기다려야죠.

성 정체성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직접 상담도 해주신다면서요.
성소수자들끼리 소통하는 게이 애플리케이션이 있어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창구죠. 때로는 게이 아들을 둔 부모님이 종종 가게로 직접 찾아오시기도 해요. 대부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죠. 비슷한 갈등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그들의 말 못할 고민을 들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요즘도 성소수자와 관련된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에요. 제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어요.

▼커밍아웃한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홍석천 씨만큼 유명한 게이는 없는 것 같아요.
한때는 되게 서운했어요. 되게 외로웠고요. 혼자 손가락질 받으면서 싸우기가 버거울 때도 많았죠. ‘어떤 분야든 분명 누군가가 있을 텐데, 나보다 더 명망 있는 사람이 커밍아웃을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요. 그들은 모두 커밍아웃 이후 제가 겪은 아픔들을 지켜봤으니 더 결정하기 힘들었겠죠.

홍석천 씨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없어서일까요.
저요? 용기 있는 척하는 것뿐이지 절대 용감하지 않아요. 사실은 되게 소심하고 겁도 많아요.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해외여행도 연예인이 되고 나서 처음 가봤을 정도니까요. 일본도 잘 못 가요. 지진 날까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도, 깊이 사귀는 것도 잘 못하는 숙맥이죠. 그런데 결정적일 때 고집이 있어요.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꼭 해내는 성격이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나요.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나요.
어릴 땐 연기자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막연하게 방송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1988년 여름에 강변가요제를 봤는데 이상은 씨가 ‘담다디’를 부르는 걸 보고 ‘어떻게 저렇게 무대를 휘어잡을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저렇게 강단 있는 사람은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알아보니 한양대 연극영화과더라고요. 그래서 그 대학에 진학했고, 연기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거예요. 지금은 예능 프로그램 위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저는 요즘도 연기와 관련된 일을 부탁받으면 무조건 하는 편이에요. 외국에 갈 때 직업란엔 항상 배우라고 쓰고요. 이번에 20주년을 맞은 연극 〈 라이어 〉의 20주년 특별공연 〈 스페셜 라이어 〉 무대에도 서게 됐어요. 제가 그 연극의 원년 멤버거든요.

오랜만에 연기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며 미소 짓는 홍석천을 보니, 그의 인생이 참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자 “그, 그건…죽기 전에 하는 말인데”라며 킥킥 웃는다. 여전히 그는 소년의 얼굴이다.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최정미

editor 정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