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대통령 부인은 청와대에서 선출되거나 임명되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김 여사는 법적인 한계와 뒤에 서지 않겠다는 소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제외하고 역대 영부인들 가운데 청와대 시절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 두 사람이다.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와 ‘이희호 자서전 동행’에는 수습 기간도 없이 줄타기를 해야 하는 김 여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①영부인 활동은 영부인 예산 범위 안에서=이순자 여사는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의 설립이 “대통령 부인이기에 가능했다”며 ‘청와대 시절의 보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단체는 훗날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 창구로 비난받았다. 이희호 여사도 “대통령 부인이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데 부정적인 시각이 많더라”고 적었다. 그가 주도했던 ‘사랑의 간식 나누기’ 행사는 아이디어만 좋으면 정부나 기업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됨을 보여준다. 그는 봉지를 뜯지 않은 기내식들이 그대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항공사와 관세청, 식약처의 협조를 얻어 이를 전국의 공부방 어린이들에게 간식으로 나눠줬다.
③개인의 일상도 중요하다=이순자 여사는 둘째 아들 재용 씨가 고3이 되자 남편과 번갈아 가며 공부방을 지켰다. 저녁식사 후 오후 9시까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 그 다음은 이 여사 차례였다. 청와대란 “가족의 일상이 국가의 일상에 노출된 채 일희일비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사적 일상을 챙기는 대통령은 공적 업무에만 매몰된 이보다 균형감과 친근감을 준다.
④친인척 눈빛을 감시하라=집권 이듬해인 1981년 시댁을 찾은 이순자 여사는 눈빛이 확 달라져 버린 친척들을 보고 무서웠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던 순박한 이들에게 고급 차를 탄 사람들이 접근해 “회장으로 모시겠다”며 굽실거렸다. 이후 권력형 비리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이희호 여사는 42세에 제왕절개로 낳은 막내 홍걸 씨가 ‘최규선 게이트’로, 한 달 후엔 둘째 홍업 씨가 ‘이용호 게이트’로 구속되자 무릎을 꿇었다. “주여, 저의 기도가 부족했습니까? 저희가 교만했나요?”
⑤정상엔 키 작은 나무가 자란다=백담사 시절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이순자 여사는 놀랐다. 정상의 나무들이 모두 기어가는 듯 누워 있더란다. 그는 “나무건 사람이건 몸을 낮추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정상이다. 삶의 정상은 겸손한 자만이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일행을 날려버릴 듯 세찬 바람을 맞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산의 정상은 그 누구도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 아아, 우리는 청와대라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하산의 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