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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영의 뉴스룸]헛발질만 바라는 정치

입력 | 2017-05-17 03:00:00


홍수영 정치부 기자

5·9대선 공식 선거운동 종료를 두 시간여 앞둔 8일 밤. 자유한국당의 한 초선 의원이 벅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뚜껑을 열어보면 깜짝 놀랄 거다. 지역을 다녀보면 분위기가 다르다. (홍준표 대선 후보가) 38∼40%까지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개표 결과 홍 후보의 득표율은 24.0%로 2위였다.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는 ‘블랙아웃’ 기간 동안 ‘실버크로스(2, 3위 간 지지율 교차)를 이뤘지만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대선 결과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민심이 이 정도로 기울어졌는지 정말 몰랐다. 20, 30대 보좌진만 해도 그간 (옛)범여권에 싸늘했는데 내가 무심히 넘긴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초선 의원들도 읍면동 단위 개표 결과를 들여다보곤 그제야 위기감을 절감한 모습이었다. 지난해 20대 총선 이후 처음 받아보는 ‘지역 성적표’였고, 자신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단 생각에 아찔해진 것이다.

초선들의 이런 모습에 반해 한국당 재선 이상은 한결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한 재선 의원은 사석에서 대놓고 “차라리 문재인 후보가 되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간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을 때였다. 기왕 정권을 내줘야 한다면 중도보수 노선을 취하는 안 후보 쪽보다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야 ‘선명한 야당’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더 수월하다는 계산이었다.

선거일 당일 방송사 출구조사로 패색이 짙어졌을 땐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같은 논리를 펴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정치 상황에선 “차라리 야당이 되는 게 낫다”는 주장이었다. 한 3선 의원은 “지금 국민들이 보통 국민들이냐. 대통령 탄핵과 파면을 이뤄낸 국민들”이라며 “이번 대통령은 여러모로 편치 않을 거다”라고 했다. “3년 뒤 총선까지 갈 필요도 없이 당장 1년 뒤 지방선거에서 누가 웃을지 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홍 후보나 죽기 살기로 뛴 당직자들은 이 얘기가 마뜩지 않을 수 있다. 일부 의원들의 모습일 뿐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태지도 덜지도 않은, 그동안 만난 적지 않은 한국당 의원들의 모습 그대로다.

의원 개개인을 탓하려는 건 아니다. 이는 집권 9년여 동안 보수층의 ‘박정희 향수’와 야당의 ‘헛발질’에 기대어 세력을 유지해온 보수 정당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리한 보도로 곤욕을 겪으면 언론 탓을, 지지율이 낮게 나오면 여론조사기관 탓을 했다. 그렇게 보수 정당이 민심에 둔감해진 사이 민주당은 시행착오를 하나씩 줄이며 한때 코웃음을 받았던 ‘수권 정당’의 목표에 한 발씩 다가갔다.

‘정치인 박근혜’를 키운 건 8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 혜성처럼 등장해 ‘4대 악법’ 반대 장외집회를 이끌고 각종 선거를 휩쓸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정치인 박근혜’의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행여 한국당이 다시 이런 보수를 꿈꾸질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적대적 공생관계에 기반을 두고 ‘공갈빵’처럼 커온 정치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는 국민 모두가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지켜봤다.
 
홍수영 정치부 기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