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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의 뉴스룸]마을회관 앞의 힙스터들

입력 | 2017-05-11 03:00:00


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얼마 전 당일치기로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새벽에 출발해 서핑 성지로 떠오르고 있는 양양 해변까지 내달렸다. 요즘 강원도는 젊은 사람들에게 ‘포스트 제주’로 각광받고 있다. 과연 바닷바람이 찬 계절인데도 이른 시간부터 서핑슈트 차림의 수십 명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런 서퍼들이 주요 해변마다 크고 작은 군락을 이루며 ‘지금껏 알던 동해’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핑숍 테라스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가게에서 빌려주는 독일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민소매 차림으로 한담을 주고받는 청년들, 서핑 강습 등록을 마치고 흥분한 채 짐을 푸는 일행들…. 그중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건 잘 그을린 피부에 에스닉 문양 비치타월을 두른 채 무심히 ‘마을회관’ 쪽으로 걸어가던 서퍼들의 뒷모습이었다. 마을회관과 태닝한 서퍼의 조합이라니! 그 느낌만은 정말 하와이 할레이바 타운 못지않았다. 이곳이 소문대로 ‘힙(hip)’한 곳이 됐음을 보여주는 징표들 같았다.

돌이켜보면 제주가 수학여행지란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던진 것도 올레길 열풍과 저가항공 대중화로 개성 넘치는 수많은 힙스터(남다른 트렌드를 이끄는 사람)들이 몰린 덕이 컸다. 농가 주택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카페, 공방 등이 속속 생겼다. 낮에는 올레길을 걷거나 스쿠터로 해안도로를 쏘다니고, 저녁이면 정겨운 돌담길과 서까래를 그대로 살린 농가 주택으로 돌아와 낯선 여행자들과 어울렸다. 5일장에서 장 보고, 렌틸콩으로 아침상 차리고, 아시탕가 요가를 하며 사는 제주식 느린 삶은 여행객들을 매료시켰다. 관광전문가들이 최신 트렌드로 꼽는 ‘로컬’ ‘슬로’ ‘이색체험’이 모두 맞아떨어진 결과다.

나영석 PD의 신작인 ‘윤식당’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똑같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발리의 한 섬과 그곳의 로컬문화에 스며들어 소꿉놀이하듯 식당을 꾸려가는 과정은 ‘새로운 여행’을 갈구하는 대중의 욕망을 영리하게 자극한다. 어차피 여행은 ‘지금 여기서’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과 조우하는 과정이다. 치열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지금 가장 원하는 가능성인 ‘느림, 여유, 로컬, 남다른 경험’이 거기에 다 있으니 열광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라고 이런 경험이 불가능하지 않다. 허름한 골목 속에 숨은 퓨전음식점이나 슬레이트 가옥 마당에 진열된 미끈한 서핑보드들을 보니 더없이 한국적인 풍경의 동해 바다에서도 여행객들의 로망을 실현시켜 줄 ‘윤식당’은 충분히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아직까진 그게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다.

지난주 황금연휴에 200만 명이 해외로 나갔다. 가깝고 아름다운 국내 관광지를 두고 자꾸 해외로 가는 이유 중엔 ‘국내는 시끄럽고 촌스럽다’란 편견이 있다. 경관과 조화를 못 이룬 조잡한 건물과 불야성을 이룬 횟집, 뜬금없이 크기만 한 조형물로 채워진 관광지가 아직 많은 게 사실이다. 요즘 여행자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엔 여러모로 어려운 콘텐츠들이다.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한 방안에 관심이 높은 때지만, 여행을 충동하는 진짜 욕망을 읽다 보면 뭔가를 자꾸 짓고 고치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해변으로 다시 한 번 눈길을 돌려보자. 확실히 우리는 마을회관 앞의 힙스터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