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진잼’을 아십니까
1000원으로 각종 문구류와 생활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다이소 매장(위 사진)은 탕진재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들은 인형 뽑기(아래 왼쪽 사진)나 간식, 문구류 등을 많이 구매한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탕진잼’이라는 반어적인 표현과 함께 사진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동아일보DB·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대기오염 세계 2위란 ‘쾌거’가 전해진 날. 골방에 틀어박힌 에이전트2(정양환)는 뭔가를 끼적거리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요원7(임희윤)과 26(유원모)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따져 물었다.
“으응? 심, 심오한 물리학의 세계에 취해 있었다네.”
재빨리 종이 한 장을 낚아챈 26. 넘겨받은 요원7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요새 ‘인형 뽑기’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요? ‘탕진잼’에 빠졌구먼.”
오호통재라. 탕진잼은 또 뭐기에 외계요원마저. 혹시 한때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며 ‘악마의 잼’으로 불린 누텔라의 부활인가. 위기감을 느낀 에이전트26은 2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곧장 수사에 착수했다.
○ 아낌없이 펑펑 써라, 단 3만 원 이하로
탕진(蕩盡)이라…. 그 옛날 동화책에서나 접하던 단어가 21세기에 인기라니. 일단 여론조사업체 엠브레인의 도움을 얻어 탕진잼의 실체부터 파악해 봤다.
에이전트26이 만난 금융사 직원 이모 씨(31)도 1주일에 두세 번씩 인형 뽑기방을 찾는 덕후. 지난 3개월 동안 50만 원 이상 썼다. 하도 갔더니 알바생이 공짜로 횟수도 늘려주고 대신 뽑아준 적도 있단다. 그는 왜 이런 탕진잼에 빠졌을까.
실제 설문조사에서도 그들의 탕진은 탕진이라 하기도 멋쩍었다. 1번에 ‘3만 원 이하’가 48.3%였다. 그저 주머니에 가진 돈 털어 흥 한번 내는 찰나의 만족. 그들은 그걸 스스로 탕진이라 부르고 있었다.
○ 거친 생각과 불안한 미래와 그걸 지켜보는 너
왜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탕진잼을 좋아할까.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과 탕진재머(탕진잼을 즐기는 사람)는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둘 다 불확실한 미래보단 현재의 만족을 지향하는 공통점은 있죠. 허나 해외에서 들어온 개념인 욜로는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있는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과소비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반면 탕진잼은 장기 불황에 청년 실업난이 겹친 한국적 상황이 반영된 거예요. 쌈짓돈 쓴 것도 탕진이라 부르는 일종의 반어법이죠. 청년세대의 박탈감이 깊게 깔려있다고 봐야 합니다.”
문구점에서 필기구 등 사무용품을 사며 탕진잼을 즐긴다는 서모 씨(28·여)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1주일에 최소 한 번씩 가는데 적은 비용으로 큰 만족을 얻는 기쁨이 너무 크다”며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에서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에이전트26은 그제야 잡았던 요원2의 뒷덜미를 놓았다. 나름 거기서 위안을 찾는지도 모르고. 26은 따뜻한 눈길로 2를 일으켜 세웠다.
“뽑기가 그리 재밌어요? 그간 인형은 얼마나 모았는데요?”
“어…, 자취방에 200개쯤? 근데 월급 가불한 거 다 썼는데 돈 좀 꿔줘라.”
그래, 선배를 위해 뭐가 아까우랴. 얼른 병원에 방 하나 잡아야겠다.(다음 회에 계속)
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