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선생이 쓰신 ‘한조불록기신론(漢祖不錄紀信論)’의 첫머리입니다. 인정상 그렇게 하면 안 될 일을 한다면 여기에는 틀림없이 속사정과 숨은 뜻이 있다면서, 한고조(漢高祖)가 기신(紀信)의 공을 녹훈해 주지 않은 일을 예로 드십니다.
고조가 기신을 봉(封)해 주지 않은 것은 잊어버리고 저버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나머지 그 일을 거론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뱀(蛇)이었던 시절은 숨기고 지금 용(龍)이 된 것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 그러나 형양에서의 일을 어찌 숨겨야만 하겠는가. 이런 일이 아니고서는 왕업(王業)을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천명(天命)을 받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 또 기신과 같은 신하가 있었는데도 그 충성스러운 공을 모른 체해 버린다면 신하된 자들을 어떻게 권장할 수 있겠는가. 숨겨서는 안 될 일을 숨기고 모른 체해서는 안 될 일을 모른 체하였으니, 여기에서 고조는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고 할 것이다.
성인(聖人)도 허물이 있지만 바로 고치면 만인이 우러러본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솔직히 고백하고 고친다면 성인(聖人)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성인(成人)은 될 것입니다. 잘못을 감추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소인(小人)으로 남을 뿐입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