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철 ‘당신만을 위한 말’전 개념미술가의 ‘속 깊은’ 전시 그의 손이 닿으면 평범한 사물에도 철학이 스며
다리가 배를 젓는 노로 변형된 ‘노/의자’(왼쪽)와 펠트 천으로 덮인 스펀지 작품 ‘당신만을 위한 말’. 의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가구이지만 다리 대신 달린 노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담겼다. 현대인처럼. ‘당신만을 위한 말’에 입을 대고 어떤 얘길 해도 다 듣고 묻어줄 것 같다. 국제갤러리 제공
나무공이 굴러가는 시간만큼은 그 앞에 서서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안규철 씨(62)의 작품답다. 그는 개념미술가라는 설명이 따라붙는 작가다. 평범한 사물에 그의 손이 닿으면 철학이 깃든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당신만을 위한 말’전에서도 작가는 평범한 사물을 변주해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 보인다.
전시장을 열면 관객들을 맞는 소품들이 그렇다. ‘평등의 원칙 Ⅱ’에선 농구공, 배구공, 야구공, 축구공 등 실제론 저마다 크기가 다른 공들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얼핏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획일화에 대한 비판이 읽혀진다. 표범 가죽을 입힌 양은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펠트로 만든 ‘과묵한 종’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본래 기능을 상실한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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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대의 자전거.’ 자전거 두 대를 반으로 갈라 손잡이는 다른 손잡이와, 안장은 다른 안장과 맞닿은 모습으로 재구성했다. 어딘가로 갈 수도, 제자리에 머물 수도 없다. 국제갤러리 제공
조소과를 졸업하고 오브제 작업을 해온 작가가 이번 전시회에서 회화작품을 선보인 것도 눈길을 끈다. ‘달을 그리는 법 Ⅱ’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밝은 원을 그린 10호 크기 캔버스 작품 13점이다. 작가는 둥근 조명을 비춰 원을 그리고, 달과 가장 가까운 색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렇게 그려진 13점의 달 색깔은 모두 다르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도 이렇게 달 빛깔이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사람들의 눈에 비친 달빛은 또 얼마나 다양할까. 진짜 달빛을 구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자연의, 시선의, 사유의 다채로운 확장을 확인할 수 있어 의미 있다. 31일까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