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독립군’ 북간도 한인들의 생활사<중>명동촌의 주거 문화
1919년 3월 13일 용정 천주교 예배당의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북간도의 한인 3만 명은 용정 서전평야에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해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만세시위의 배경에는 항일민족교육이 있었다. 주도한 분들이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 교원으로 구성된 충렬대원이었던 것이다.
태극기와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 있는 북간도 한인들의 막새기와.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막새기와의 문양은 6개 유형으로 나뉘지만 꽃문양과 태극문양이 핵심이다. 태극기형 문양은 중앙에 삼태극을 새기고, 상하좌우로 이감태진( z { x y )의 4괘를 그렸다. 그 위쪽 좌우에는 원안에 든 십자가, 아래쪽 좌우에는 무궁화문을 새겼다. 항일민족의식과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상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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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유형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양은 무궁화문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도상으로 봐 이왕가의 문장(紋章)이었던 이화문(李花紋·자두꽃 무늬)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역만리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극기와 십자가를 새긴 그분들이 과연 이왕가의 문장을 새겼을까?
일제의 의도에 따라 이화가 나라꽃처럼 행세할 때, 무궁화는 겨레의 꽃으로 겨레의 정신적 회귀처였다. 우표와 화폐, 대례복과 군복에는 이화문, 무궁화문이 국가의 상징문양으로 서로 자리다툼을 거듭하다 1905년 이후 완전히 이화문으로 바뀐다. 1910년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면서 이화문은 이왕가의 문장으로 전락하지만, 무궁화는 여전히 겨레 꽃의 위상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는 민족학교에서, 그 토대였던 명동촌에서 사용된 막새기와의 문양은 무궁화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북간도 한인들의 전형적인 함경도식 주택.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명동촌 한인들은 어릴 때부터 태극기와 무궁화, 십자가가 새겨진 막새기와로 이은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공부하고, 뛰어놀았다. 일상에서 몸에 밴 항일민족의식이 3·13만세운동을 일으킬 힘이 되었고,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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