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주간동아팀 차장
나치 치하에서 우연히 친위대에 들어간 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는 일을 한다. 또 한 번 유대인의 이동이 있던 어느 날, 잠시 머물렀던 성당 안에 큰불이 나지만 그 누구도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상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결국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이 그곳에서 사망한다. 세월이 흘러 재판정에 선 한나는 지시 서류에 서명을 한 총책임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다. 사실 한나는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 하지만 그는 차마 해명을 못하고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교도소에 간 그는 10대 소년 시절부터 책을 읽어줬던 마이클의 도움으로 글을 깨치면서 모든 악(惡)이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부 관료들은 “몰랐다” 또는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로 헌법을 거스르고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일명 블랙리스트)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들에게 면책권을 준 이들은 ‘칼날’ 수사로 전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특검은 7일 문체부의 블랙리스트 사건 수사와 관련해, 당시까지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대통령실 관련 수석 및 비서관, 문체부 장차관 등 정무직 공무원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그 이하 실·국장과 실무 과장들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규철 특검보는 이날 “(7일까지) 기소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향후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전혀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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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실장이 시종일관 “나는 몰랐다”라고 발뺌을 해서일까. 블랙리스트 작성 실무를 담당했던 과장 또한 “저는 잘 몰라요. 맨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에요”라고 되뇌었다 한다. 그 과장 위의 국장과 실장, 차관보를 지냈던 이들은 일언반구도 없다. 조윤선 전 장관의 구속 직후인 1월 23일 있은 문체부의 공식 사과는 그들의 이름 앞에 왜 ‘영혼 없는’이란 수식어가 붙는지 그 이유를 확인시켰다. ‘진심 어린 사과’, ‘재발 방지책 마련’이라는 말의 잔치만 있었을 뿐, 누가 어디까지 얼마나 잘못했는지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시인은 단 한 줄도 없었다.
해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은 “운이 없어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됐을 뿐”이라며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나치 정권과 히틀러에게 돌린다. 이런 아이히만의 모습 속에서 ‘악의 평범함’을 발견한 아렌트는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행여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고자 하는 공무원이 있다면, 심리학자 폴 부르제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격언부터 곱씹길 권해 본다.
최영철 주간동아팀 차장 ftdog@donga.com